제10화. 텅 빈 필름에 맺힌 것 - 최종화

by 마르코 루시

서울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윤의 일상은 겉보기엔 완벽하게 복구되었다.

오전 7시 기상, 만원 지하철, 오전 회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야근, 그리고 막차.

건조하고 반복적인 서울의 시간은 타이페이에서의 기억을 빠르게 풍화시키는 듯했다. 습기는 말랐고, 홍등의 붉은 잔상은 회색 빌딩 숲에 묻혔다.

하지만 균열은 미세한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윤은 더 이상 회의 시간에 영혼 없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마음에 없는 카피를 쓰는 대신, 창밖의 구름을 멍하니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팀원들은 그가 ‘휴가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수군거렸지만, 그는 정정하지 않았다.이것은 후유증이 아니라, 치유의 과정이었으니까.

비가 내리는 금요일 밤이었다.

이윤은 퇴근길에 충무로의 낡은 카메라 수리점을 찾았다.

먼지 쌓인 유리 진열장 너머로 백발의 수리공이 돋보기를 쓴 채 그를 맞이했다.

“이거, 셔터 막이 나갔네. 필름 감는 레버도 헛돌고.”

수리공이 니콘 FM2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혀를 찼다.

“고칠 수 있습니까?”

“못 고칠 게 뭐 있어. 부품만 갈면 새것처럼 되지. 근데 왜 이제 가져왔어? 꽤 오래 방치한 것 같은데.”

이윤은 카메라의 낡은 가죽 케이스를 쓸어보았다.

“……준비가 안 돼서요.”

“준비?”

“이 녀석이 다시 세상을 담을 준비요. 그리고 저도.”

수리공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윤은 담담하게 수리를 맡겼다.

그리고 그는 가방에서 필름 한 롤을 꺼냈다.

타이페이에서 7일 동안 카메라에 들어있던 필름이었다. 셔터가 눌리긴 했지만, 필름이 감기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을 롤이었다.

“이것도 현상해 주십시오.”

“이거? 아까 말했잖아. 레버가 헛돌아서 안 찍혔을 거라고. 그냥 다 탔을 텐데?”

“압니다. 그래도 해주세요.”

이윤의 고집에 수리공은 고개를 저으며 필름을 받아 들었다.

3일 뒤, 이윤은 현상된 필름을 찾았다. 예상대로였다. 필름은 모두 까맣게 타 있거나, 투명하게 비어 있었다. 단 한 장의 풍경도, 단 한 장의 인물도 기록되지 않았다. 이윤은 방 안의 형광등 불빛에 그 텅 빈 필름을 비춰보았다. 투명한 셀룰로이드 막 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윤의 눈에는 보였다. 첫 번째 칸에는 공항의 눅눅한 공기가, 다섯 번째 칸에는 비에 젖은 중정기념당의 광장이, 열두 번째 칸에는 지우펀의 붉은 홍등이 그리고 마지막 서른여섯 번째 칸에는, 공항 게이트 앞에서의 결심이.

그는 가위를 가져와 필름을 잘랐다. 그리고 가장 깨끗하게 비어 있는 한 컷을 골랐다. 그것은 클레르가 손으로 렌즈를 막으며 했던 말, “기록되지 않아도 내가 기억할 테니까”가 물리적으로 증명된 결과물이었다.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저장된 이름 ‘비(Rain)’.

한 달 동안 한 번도 누르지 않았던 그 이름을 눌렀다.

서울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창밖으로 빗소리가 제법 거세게 들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노란색 라이터를 꺼냈다. 엄지로 부싯돌을 밀어 올렸다.

치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붉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흔들리지만, 끈질기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불꽃을 바라보며 메시지 창에 글을 적었다.

[ 서울엔 비가 옵니다. 그리고 라이터가 켜졌습니다. ]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가 1이라는 숫자와 함께 사라졌다. 파리는 지금 오후 2시일 것이다. 그녀가 보고 있을까. 아니면 바쁜 일상에 치여 잊어버렸을까. 이윤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에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때, 징- 하고 진동이 울렸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비(Rain)’라는 이름과 함께 사진 한 장이 도착해 있었다. 사진 속 배경은 파리의 에펠탑이 보이는 어느 카페 테라스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야시장에서 이윤이 사주었던 하얀 과일(석가)을 닮은 디저트 접시와, 빈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빈 의자 위에는 이윤의 카메라 기종과 똑같은, 낡은 필름 카메라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이어서 짧은 텍스트가 도착했다.

[ 여기는 늘 비가 와요. 내 불은 꺼졌고요. ]

[ 당신의 불이 필요해요. ]

이윤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짓는, 가장 편안하고 환한 웃음이었다. 그녀의 라이터는 그에게 있고, 그녀의 불은 꺼져 있었다. 그것은 오직 그만이 다시 켤 수 있다는 명백한 초대였다. 그는 곧바로 항공사 앱을 켰다.

‘서울(ICN) 파리(CDG)’

편도 티켓.

망설임은 없었다. 그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도망이 아니었다. 고쳐진 카메라와, 텅 빈 필름 한 컷, 그리고 노란색 라이터를 챙겼다. 그의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그는 창문을 열었다. 서울의 비 냄새 속에서, 희미하게 파리의 시트러스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À bientôt.”

그가 허공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비가 그치면, 아니 비가 내리는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이다. 이번엔 우산 없이, 온전히 서로를 적시기 위해.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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