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도망치면 좋겠다는 생각

-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1화 -

by 마르코 루시

출근길이었다.

늘 걷는 길이었고, 늘 같은 음악을 들으며

같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는 아침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모든 게 평소와 다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갑자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절망도 없었다.

누가 상처를 준 것도 아니고,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아주 조용히,

이 상태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지 못하고 돌아섰다.

전화기를 껐고,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회사에는 ‘지각할 것 같다’는 한 줄 메시지만 남겼다.

그 메시지를 보내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같은 말이 맴돌았다.


이대로, 그냥, 도망치고 싶다.


카페에 앉았다. 평소엔 시끄럽다고

느껴지던 공간이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었고, 테이블 위에 떨어지는

커피 방울 소리만 또렷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를 묻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생각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졌다.


살면서 몇 번이나 이 감정을 느꼈는지 모른다.

너무 피곤하거나, 너무 괜찮은 척을 오래 했거나,

누군가에게 끝없이 설명해야 할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사라지고 싶었다.


내가 없으면 세상은 조금 더 가벼워질 거라는 착각.

누군가 내 빈자리를 금방 채우겠지,

그러니까 사라져도 괜찮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지워가는 상상.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그건 도망치고 싶은 본능이라는 걸.


모든 것을 감당하려고 애썼다.

내가 뭔가를 해내야 한다고 믿었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괜찮은 동료,

괜찮은 연인이 되어야 했다.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자신을 놓쳐버렸다.


그냥 사람이었다.

때로는 약하고, 무너지기도 하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존재인데,

너무 오래, 그녀답지 않게 살아왔다.


그날 이후 가끔 도망치기로 했다.

회사를 빠지고 한강에 앉아 있을 때도 있었고,

친구 약속을 거절하고 집 안에서 하루 종일

불을 끈 채 누워 있던 날도 있었다.

그런 방법들이 ‘살아내는 방식’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가 필요했고,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사라지고 싶은 그 마음을 따라 걷다 보니,

오히려 온전한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 마음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도망치고 싶다’는 감정은 내면의 알람이었다.

어딘가가 고장 났다는 신호,

내가 나를 버리려 하고 있다는 경고.


도망치고 싶은 날은 분명 다시 올 것이다.

그럴 때,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잠시 멈추기로.


도망치듯 멈춘 그날,

스스로를 아주 조금씩 사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