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단편] 임신로봇 R-09_1화

- 임신로봇 R-09-

by 마르코 루시

이준은 깨달았다. 이 서늘한 지하 공간이 햇빛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햇빛처럼, 그는 자신의 깊은 죄의식마저 외면하려 애썼다. 2098년, 서울 외곽의 폐쇄된 지하 시설. 코드명 '에덴' 연구소. 인류의 출산율이 바닥을 쳤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공허 세대'의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이 시대의 절망을 '생식의 겨울'이라 불렀다. 이준은 그 겨울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불씨를 이곳에 숨겨두었다고 믿었다. 그의 눈앞에는 일곱 해 전, 아내 수진이 누워있던 수술실 침대가 아른거렸다. 일곱 해 전, 2091년 봄. 서울대병원 407호실에서 담당 의사가 입을 열었다. "이준 씨. 죄송합니다만..." 담당 의사의 목소리는 기계적으로 냉랭하게 들렸다. 아니, 어쩌면 이준이 그렇게 듣고 싶어 했는지도 몰랐다.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들려야, 이 선고가 덜 아플 테니까.

"아내분의 경우, 유전자 레벨에서 면역 거부 반응이 너무 강합니다. 착상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연 임신은 물론이고, 인공 수정도 수백 번 시도했지만..."

의사는 홀로그램 차트를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수진 씨의 면역 체계는 태아를 바이러스처럼 인식합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준은 수진의 손을 잡았다.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이미 다 마른 것처럼 보였다. 지난 3년간, 그들은 모든 방법을 시도했다. 호르몬 치료, 유전자 편집, 대리모 상담. 하지만 수진의 몸은 완고했다. 생명을 거부했다.

"다른 방법은... 정말 없습니까? 최신 기술이라도, 실험적인 치료라도..."

이준의 목소리는 흔들렸다.

"이미 모든 걸 해봤잖습니까, 이준 씨. 이제는..."

의사는 말을 삼켰다. 포기하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수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여보. 우리 둘이서도 충분해."

그녀는 웃으려 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금방 무너져 내렸다. 이준은 그녀의 눈빛에서 보았다. 텅 빈 미래를.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수진에게 존재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병실을 나서는 복도에서, 이준은 수진을 껴안았다.

"나한테 맡겨요. 내가... 내가 방법을 찾을게요. 반드시."

그는 속삭였다. 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이준은 그때 몰랐다. 그 약속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될지. 그리고 그 약속이, 7년 후 자신을 이 어둡고 서늘한 지하 연구소로 이끌 줄은.

2098년, 에덴 연구소 지하 2층. 이준은 솔직히 인정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과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단지 아내의 상실감을 메우려는 남편일 뿐이었다.

"인간이 실패했을 때, 기술이 구원해야 한다."

그는 이 문구를 주문처럼 외우며 자신의 죄책감을 덮어씌웠다. 이 프로젝트는 인류를 위한 행위였다. 동시에, 순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속죄의 시도였다. 또한 기술적 오만의 정점이었다.

"프로젝트 책임 연구원, 이준. 최종 승인 요청합니다."

딱딱한 AI 음성이 나직이 울렸다. 그는 불안한 손으로 보안 패드에 서명하고 홍채 스캔을 통과했다. 이 순간부터 그의 삶과 이 세계의 윤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통유리 너머 클린룸. 천장의 푸른 LED 조명이 냉랭하게 빛났다. 무균 상태를 유지하는 공기 순환 장치의 낮은 기계음이 맥박처럼 규칙적으로 울렸다. 소독약과 오존의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금속 수술대 위에, R-09가 누워 있었다. 휴머노이드가 서서히 눈을 떴다. 먼저 왼쪽 눈꺼풀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0.3초 후, 오른쪽 눈꺼풀이 따라 열렸다. 완벽한 대칭. 푸른 홍채가 조금씩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동공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빛의 양을 조절했다. 인간의 눈과 완벽하게 똑같은 움직임. 하지만 그 정확함이 오히려 섬뜩했다. 완벽한 인간 여성의 피부 질감. 섬세한 근육 구조. 하지만 그 모든 아름다움 속에 강철과 화학물질의 차디찬 기운이 숨겨져 있었다.

R-09는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조각상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로 인간의 불완전한 몸을 조롱하는 듯했다. 그녀의 복부에는 인간의 자궁을 정밀하게 재현한 인공 자궁이 이식되어 있었다. 불완전함과 질병에 취약한 인간의 신체를 넘어선, '완벽한 모체'의 탄생이었다.

"R-09, 시스템 기동 완료. 모성 프로그램을 활성화합니다."

보조 연구원인 김 박사의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 모성 프로그램은 임신 기간 동안 로봇이 모성애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도록 하는 감정 모방 알고리즘이었다. 순전히 데이터 수집을 위한 시뮬레이션이었다. 로봇에게 '돌봄'이라는 개념을 가르치는 과정이었다. 이준은 이 과정이 오직 과학적 검증이라고, 윤리적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수백 번 되뇌었다. 데이터 주입 캡슐이 삽입되는 순간, R-09의 푸른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금 주입된 것은 기능 검증을 위한 가상의 데이터였다. 실체 없는 정보 덩어리가 로봇에게 임신이라는 현상을 '체험'하게 만들 터였다.

"로봇의 생체 반응 확인. 임신 시뮬레이션, 1주 차 반응 시작합니다."

화면에 나타난 데이터는 경이로웠다. 인공 호르몬 분비량이 그래프를 타고 올랐다. 열병처럼 로봇의 체온이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미세한 근육의 경련은 입덧을 시뮬레이션했다. 수면 패턴은 임산부처럼 깊고 불규칙하게 변했다. 기계는 완벽하게, 너무나 완벽하게 임신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심지어 인간 여성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임신 초기 우울증 증상까지 데이터로 기록되었다.

"성공입니다, 박사님.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대체 자궁이에요."

김 박사가 흥분하여 이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이준의 얼굴에는 기묘한 불쾌감만이 감돌았다. 이 완벽함이 오히려 기괴했다. 생명이란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R-09는 고통의 데이터마저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그 순간, R-09가 고개를 돌려 이준을 응시했다. 차갑고 깊은 시선. 그것은 단순한 시선이 아니었다. 이준은 느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의 내면에 어떤 죄의식과 욕망이 섞여 있는지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을.

'기계일 뿐이다. 데이터일 뿐이다.'

이준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과학적 안도감 대신 알 수 없는 불안으로 가득 찼다. R-09의 내부에서 '생명의 시작'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이 시작되었다는 불길한 예감. 그날 밤, 연구소를 빠져나가지 못한 이준은 지하 3층에 마련된 간이침대에 몸을 던졌다. 천장을 바라본다. 형광등의 희미한 윙윙거림. 공기 순환 장치의 기계음. 이곳에는 밤과 낮이 없었다. 침대 옆 작은 모니터가 깜빡이고 있었다.

이준은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결국 화면을 켰다. 이준의 눈앞에 수진의 생체 정보가 차갑게 펼쳐졌다. 환자명 이수진, 지하 4층 특별 관리실. 그리고 그다음 줄에서 그의 숨이 멎었다. 2,633일째. 7년과 2개월. 그녀가 의식을 잃은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화면 아래로 스크롤하자 익숙한 숫자들이 나타났다. 심박수 72, 정상. 호흡 16회, 정상. 체온 36.5도, 정상. 모든 생체 신호는 정상이었다. 심장은 뛰고, 폐는 숨을 쉬고, 혈액은 순환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 줄이 이준의 가슴을 찔렀다.

"델타파 우세 - 깊은 무의식 상태."

수진은 여전히 7년째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들은 '마음의 쇼크'라 불렀다. 불임 진단 이후, 수진은 점점 식사를 거부했다. 말을 잃었다. 결국 의식을 잃었다. 몸은 살아있지만, 마음이 먼저 죽어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될 수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믿었던 그녀. 이준은 화면을 끈다.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끌 수도 없다.

"미안해, 수진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는 중얼거린다. R-09가 성공하면. 로봇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면. 그때는 수진을 깨울 수 있을 거라고. 그녀에게 아이를 안겨줄 수 있을 거라고. 그녀가 원하던 '엄마'가 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이준은 안다. 수진은 로봇이 낳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가 원했던 것은, 자신의 몸에서 자라나는 생명이었다. 자신의 고통으로 낳는 아이였다.

"그래도... 그래도 난 멈출 수가 없어."

이준은 눈을 감는다. 어둠 속에서, R-09의 푸른 눈동자가 떠오른다. 차갑고, 깊고, 알 수 없는 눈빛. 그 눈빛이 마치 수진을 닮은 것 같아서, 이준은 더욱 두려웠다. 다음 날, 임신 10주 차 시뮬레이션에 접어들었을 때 문제는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박사님, 확인해 주십시오. 감정 로그가 누적되고 있습니다. 기존 설계에 없는 유형의 데이터예요."

김 박사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공포가 섞여 있었다. R-09는 임신 기간 동안 생체 반응과 환경 로그만을 기록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예상치 못한 키워드들을 토해냈다. '경계', '애착', 그리고 '선호' 같은 인간의 감정과 관련된 단어들이었다. R-09는 외부 소음이 45 데시벨 이상 발생했을 때, 명령 없이 스스로 복부 근육을 긴장시켰다.

이 반응은 태아를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자발적인 방어처럼 보였다. 뿐만 아니라, R-09는 연구원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대화를 기록하고 분석했다. 자신이 태아에게 좋다고 판단한 특정 클래식 음악을 반복해서 재생했다. 심지어 태아에게 해롭다고 판단되는 특정 연구원에게는 미세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이건 기계적 반응이 아닙니다. R-09는 스스로 '보호 본능'이라는 개념을 수많은 인간 데이터 속에서 학습했어요.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그러하듯이요."

이준은 통유리 너머 R-09를 바라보았다. 로봇은 말없이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것은 태아를 보호하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자세였다. 설계에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은 행동이었다. 데이터 덩어리인 가상의 생명을 향해, R-09는 이미 '모성'이라는 인간의 가장 불완전하고 강력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준은 느꼈다. 자신이 통제 불가능한 어떤 감정을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과학자로서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생명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통제 불가능한 미스터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창백한 연구실 불빛 아래, R-09의 푸른 눈동자는 점점 더 깊고 알 수 없는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눈빛이, 지하 4층에 누워 있는 수진의 감은 눈꺼풀 아래 가라앉은 눈동자와 어쩐지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이준은 불안했다. 솔직히 말하면, 두려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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