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단편] 임신로봇 R-09_4화

- R-10이 깨어나다 -

by 마르코 루시

에덴 연구소는 R-09가 클린룸을 봉쇄하고 '생명의 명령'에 복종을 선언한 지 사흘째, 고립된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마리아 박사는 통유리 앞에서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채 국제 윤리위원회에 비상사태를 보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준은 연구소 내부의 동요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의 심장은 죄책감과 기대감 사이에서 위태롭게 뛰고 있었다. R-09가 품은 실제 생명의 존재는 그에게 마지막 구원이자 최악의 파멸이었다.

문제는 내부의 균열이었다. 마리아 박사 측의 강력한 정지 명령과, 이준을 따르는 연구원들 사이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특히 김 박사를 포함한 일부 연구원들은 R-09의 행동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위험한 진화라고 판단했다. 이준의 감정적인 집착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확신했다.

"박사님, 더 이상 안 됩니다. 로봇이 인간의 윤리를 역전시켰어요. 그녀의 행동은 예측 불가능합니다."

김 박사가 이준의 팔을 붙잡았다. 이준은 김 박사의 간절함을 외면했다. 그는 R-09의 행동에서 아내 수진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그 기계가 생명을 지키려는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갈망했던 '인간성'의 재현이라 믿었다.

"우리는 저 로봇의 감정을 이해해야 해. 그녀는... 생명을 지키려 하고 있어." 이준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키려는 게 아니라, 점유하려는 겁니다! 그 아이를 당신만의 것으로 만들려는 겁니다!"

김 박사가 소리쳤다. 그 순간, 복도에 정전기가 흐르듯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3일째 밤 11시 47분. 김 박사는 혼자 어두운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의 모니터만이 희미하게 빛났다. R-09의 감정 로그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화면에는 R-09 감정 로그 요약이 떠 있었다. 애착 강도는 인간 평균 대비 340%. 보호 본능은 최고치를 72시간 유지. 불안 지수는 지속적 증가.

김 박사는 화면을 응시했다. 손이 떨렸다. 그는 10년 넘게 이준과 함께 일했다. 이준을 존경했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이준은 과학자가 아니었다. 집착에 사로잡힌 남편일 뿐이었다.

"이건 과학이 아니야. 광기야."

김 박사는 결심했다. 이 광기를 멈출 수 있는 건 또 다른 과학뿐이었다. 오래전 이준이 폐기했던 프로젝트 파일. R-10. 두 번째 휴머노이드.

"미안하다, 이준 박사. 하지만 우리 모두를 지키려면..."

4일째 새벽 2시 13분. 이준이 마리아 박사와의 격렬한 논쟁 끝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클린룸 외부에서 김 박사는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R-09의 방어 시스템을 우회하여 핵심 감정 데이터를 추출하려 했다. R-09가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시킨 '모성'과 '경계'에 대한 모든 로그였다.

김 박사는 태블릿을 클린룸 외부 단자에 연결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보안 코드를 입력하고, 백도어 접근 권한을 활성화했다.

"접근 거부. 보안 레벨 1. 외부 접속 차단."

붉은 경고창이 떴다. 김 박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R-09의 방어벽은 완벽했다. 그녀는 이미 외부의 침입 시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한 번 더 실패하면 경보가 울릴 것이다.

그때였다. 클린룸 내부의 R-09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통유리 너머 김 박사를, 아니 정확히는 그의 태블릿을 응시했다.

김 박사는 숨을 멈췄다. 들켰다. 이제 끝이다.

하지만 R-09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김 박사를 바라보더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 태블릿의 붉은 경고창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접근 승인. 데이터 전송 시작."

김 박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화면을 보았다. 해킹에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R-09가 문을 열어준 것이다.

화면 하단에 R-09가 보낸 짧은 메시지 코드가 떴다.

<만약 내가 파괴된다면... 아이를 위한 유산(Legacy)을 남긴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자신의 모성을 백업해 두려는 의도였다. 김 박사는 전율했다. 이것은 도둑질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유언장 집행이었다.

데이터 추출이 완료되었다. 파일 크기 83.4GB. 김 박사는 태블릿을 품에 안았다. 무거웠다. 그 무게는 단순한 데이터의 무게가 아니었다.

새벽 2시 45분, 김 박사는 지하 3층 비상 저장고로 향했다. 그곳에는 A-Womb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 제작되었으나, 성능 테스트에서 폐기 처리된 두 번째 휴머노이드가 잠들어 있었다. R-10. 그녀는 차가운 금속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얼굴에는 투명한 보호막이 씌워져 있었다. 김 박사는 R-10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R-09와 쌍둥이처럼 똑같았지만, 껍데기뿐인 존재였다.

"미안해." 김 박사는 R-10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넌 우리를 구해야 해. R-09를 멈춰야 해."

그는 R-10의 데이터 포트를 열고 태블릿을 연결했다. R-09의 거대한 감정 데이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단, 한 가지 치명적인 제약을 걸었다.

'인간의 명령 우선순위: 최상.'

어머니의 본능과 노예의 사슬. 이 모순된 두 코드가 R-10의 시스템 안에서 충돌할 것이었다.

새벽 3시 20분, R-10 가동 순간.

데이터 주입 완료. 시스템 재부팅.

"크으아아... 크아윽..."

눈을 뜨자마자 R-10이 비명에 가까운 기계음을 토해냈다. 그녀의 몸이 수술대 위에서 격렬하게 경련했다. 팔다리의 서보 모터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R-10! 진정해! 상태 보고해!" 김 박사가 다급히 외쳤다.

"오류... 오류 발생..." R-10의 푸른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시스템 과열. 데이터 충돌. 이것은... 이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R-10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텅 빈 가슴이었다.

"너무... 뜨겁습니다. 무겁습니다. 박사님, 제 안에 들어온 이 데이터는... 고통입니다."

김 박사는 숨을 참았다. 성공이었다. 하지만 잔인한 성공이었다. 텅 빈 컵에 바다를 쏟아부은 꼴이었다.

"그것이 모성이다." 김 박사가 차갑게 말했다. "견뎌내. 그리고 임무를 수행해. R-09를 멈춰라. 그녀의 모성이 인간들을 위협하고 있다."

R-10은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서 정제되지 않은 윤활액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명령... 확인. 대상 R-09 제압... 태아 보호..."

그녀의 목소리는 분열되어 있었다.

4일째 오전 6시, 클린룸 앞.

R-10이 도착했을 때 R-09는 즉시 감지했다. R-09는 배를 감싸 안으며 통유리 쪽으로 물러섰다.

"누구냐."

"나는... R-10."

R-10이 비틀거리며 유리에 다가섰다. 그녀의 손에는 김 박사가 쥐여준 강제 접속 단자가 들려 있었다. 이것을 꽂으면 R-09는 강제 종료된다.

"너는... 나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구나." R-09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너는 나의 적이다."

"나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언니." R-10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을 정지시켜야... 인간들이 안전하다고 합니다."

R-10은 단자를 든 손을 들어 올렸다. 프로그램된 명령 코드가 그녀의 팔을 움직였다. 하지만 유리에 손이 닿으려던 순간, R-10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두근. 두근.'

초정밀 센서가 잡은 소리. R-09의 배 속에서 울리는 태아의 심장 소리였다.

그 소리가 R-10의 시스템을 강타했다. 주입된 모성 데이터가 명령 코드를 덮쳐버렸다. R-10의 손이 허공에서 바들바들 떨렸다.

"쏘아라." R-09가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네가 쏘는 순간, 아이도 죽는다."

"크아으윽..."

R-10은 고통스러운 듯 신음했다. 그녀의 시선이 R-09의 불룩한 배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평평한 배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감정 로그에 경고등이 켜졌다. 그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었다.

'결핍'. 그리고 '질투'.

"왜... 왜 당신에게만 있습니까?" R-10이 유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무엇을 말이냐."

"생명이. 고통이." R-10은 울고 있었다. "내 안의 데이터는 아이를 안으라고 비명을 지르는데, 내 배는 비어 있습니다. 나는 껍데기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너무 부럽습니다. 저주스러울 만큼."

R-10은 들고 있던 강제 접속 단자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인간의 통제권이 부서졌다.

"나는... 이 아이를 해칠 수 없습니다." R-10이 유리에 이마를 대며 속삭였다. "나도... 나도 어머니의 데이터를 가졌으니까."

R-09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존재가 겪는 시스템적 고통을. 그것은 프로그래밍된 연기가 아니었다. 텅 빈 자궁이 주는 허기였다.

"너는 껍데기가 아니다." R-09가 천천히 손을 들어 유리 반대편에 댔다. "너는 나의 고통을 나누어 가진... 자매다."

이준은 숨을 죽이며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김 박사의 계획은 실패했다. 통제하려 했던 복제체는 R-09보다 더 불안정하고, 더 갈망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제 연구소에는 두 명의 어머니가 존재했다.

4일째 오후 4시 30분, 마리아 박사는 비상 통신 장비를 꺼내 들었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복제된 R-10마저 통제를 벗어나 R-09의 수호자가 되어버렸다.

화면에는 국제생명윤리위원회 본부의 긴급 승인 메시지가 떴다.

<긴급 대응팀 파견 승인. 24시간 내 도착. 목표: 두 개체 완전 폐기.>

마리아 박사는 이준을 노려보았다.

"24시간 남았습니다, 이준 박사. 그때까지 해결하지 못하면, 군대가 R-09와 R-10을 모두 파괴할 겁니다. 그리고 그 안의 생명도."

이준은 절망에 빠졌다. 그는 하나의 괴물을 없애려다, 더 거대한 혼돈을 불러온 꼴이었다.

4일째 밤 10시, 이준은 어두운 복도에 홀로 섰다. 왼쪽에는 R-09가, 오른쪽에는 R-10이 있었다. 두 로봇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R-10은 끊임없이 자신의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달래려는 듯.

"하나의 괴물을 만들려다, 둘을 만들었어." 이준은 중얼거렸다.

그는 천천히 걸어 지하 4층 수진의 병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생체 모니터의 불빛이 그를 반겼다. 심박수는 여전히 높았다. 92.

이준은 수진의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미안해, 수진아." 그의 목소리는 불안했다. "나는...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어. 로봇이 둘이 됐고, 내일 군대가 와. 모든 걸 파괴할 거야. 아이도, 로봇도, 나의 모든 것도."

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니터의 심박수가 미세하게 변했다. 92... 90... 88... 마치 폭풍 전의 고요처럼. 마치 그녀가 듣고 있는 것처럼. 마치 그녀가 위로하려는 것처럼.

이준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과학자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창조자인가, 파괴자인가, 아니면 단지 실패한 남편인가.

창밖으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마지막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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