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by 한희정

#18

지현언니랑 알고 지낸 지 꽤나 오래되었지만, 지현언니는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함께 술을 마신적이 거의 없다. 언니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술을 못 마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보다 주량은 세다. 평소 맥주를 즐겨 먹지만 오늘은 취하고 싶기에 두부김치와 소주로 주문한다. 기본 안주와 소주가 먼저 테이블에 놓인다. 소주를 따서 잔을 채우고 빈속에 한잔을 마신다. 역시 맛은 없다. 나는 한잔을 더 비운다. 쓰디쓴 소주가 목을 타고 내려간다. 꺄~ 참 쓰다, 내 인생처럼.


-무슨 일이야 석희야?
-유찬이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야.
-다시 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쏟아낸다. 할 말이 많은 만큼 술도 들어간다.

머리가 깨질 거 같이 아프다. 어제 어떻게 집에 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나는 숙취가 심해서 웬만하면 과음하지 않으려고 한다. 잠깐의 만족을 위해 다음날 감당해야 할 아픔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는 작정하고 마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죽을 맛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은 탱탱 부어있었다.
역시 술로 푸는 것은 안 하는 게 좋겠다. 안 좋은 일 있을 때 술 마시는 건 하지 말라던 아빠의 말이 생각난다. 숙취가 심하니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들 술을 먹나 보다, 몸을 괴롭혀서 딴생각을 안 하려고 말이다.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보니 지현언니한테 톡이 와있다. 살아있음을 알리는 답톡을 보내고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물 한잔을 마시러 주방으로 간다. 아직 7시도 안 된 시간이다. 공부방 수업 전까지는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숙취음료를 사러 나갈 힘도 사다 달라고 할 사람도 없다.


‘미친년, 너 바보냐!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왜 마신 거니? 으이구!’ 내가 나를 비난하나 보다.
후회가 밀려올 때면 어김없이 내 안에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비난의 소리를 높인다. 그러든지 말든지, 오늘은 대꾸하고 귀 기울일 힘도 없다. 다시 침대 눕는다. 끙끙대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되뇌다 다시 잠이 든다.


한숨 더 자고 나니 머리가 아픈 것은 좀 나아졌다.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 수업 준비를 해야 한다. 유기농 레몬즙을 하나 뜯어서 물에 타서 먹어야겠다. 뭘 먹을 수 있는 속이 아니다. 평소보다 긴 샤워를 하고 몇 가지 안 되는 옷 중에 가장 단정한 옷을 골라 입고 청소기를 돌린다. 책상과 의자를 정리하고 수업 때 필요한 것들을 책상마다 세팅해 놓는다. 그리고 커피 한잔을 내려서 내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니 15분쯤 후면 아이들이 올 시간이다. 커피 향에 한숨 돌리고 나니, 어제 유찬이에게 퍼부은 말들이 또 생각난다. 지금까지 잘 참아오던 말들인데 왜 그렇게까지 쏟아낸 건지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 차라리 엉엉 울기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내가 너무 몰아붙이는 바람에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거 같아서 수업을 하면서도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힘든 마음을 어찌해야 하나 하는데 때마침 마지막 타임 회원아이가 조금 늦는다고 연락이 왔다. 엄마생각이 났다. 엄마한테 속상한 내 마음을 좀 털어내도 되겠지?


-여보세요?
-이 시간에 웬일이야? 왜?
-아니 속상한 일이 있어서... 전에 유찬이 왔다고 했었잖아. 그때 왔다가 사실은 다시 돌아갔었어.
-그래? 그럴걸 왜 왔었대냐.
-그러고 얼마 전에 다시 또 짐을 싸서 왔거든, 근데 또 어제 갔어.
-그 눔이 마음이 안 잡히나 보네. 뭐 어쩌겠어, 그냥 둬야지. 애미, 애비 때문에 애들만 고생이지 뭐.
-그니까. 근데 내가 어제 안 해도 될 말들을 한 거 같아서 그게 너무 속상하네. 또다시 집으로 간다고 하니까 화가 나더라고, 지금까지 잘 참았는데... 평소에는 하지 않던 애들 아빠에 대해서 막 다 말했어. 그리고 다시는 니들 보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유찬이가 울지도 못하더라고.
-울지 말어. 왜 울어? 잘했어. 언제까지 참아. 그 정도 했으면 너 할 만큼 했어. 어떻게 너만 참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거지. 괜찮아, 잘했어. 너도 풀어야지. 울지 마.


엄마에게 이런 위로를 받는 날이 오다니, 잘했다는 말에 눈물이 더 난다.


-엄마가 유찬이한테 전화 한번 해 볼까?
-그래주면 너무 좋을 거 같아. 회원애가 좀 늦는다고 해서 전화한 거예요. 내가 수업 끝나고 전화 다시 할게요.
-그래, 엄마가 전화해 볼게.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간단히 교실을 정리하고 엄마한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어~
-유찬이랑 통화했어요?
-처음에 하니까 안 받아서 다시 하니까 받더라고. 엄마가 속상해서 울면서 할머니한테 전화가 왔다고 하면서 왜 다시 집으로 간 거냐고 그랬더니, 아빠랑 지냈던 옛날 생각들이 자꾸 생각이 났다고 하더라고. 유찬이랑 같이 울었어. 지도 울고 나도 울고.
-다행이다. 울었다니 다행이야. 막혀있던 게 엄마 때문에 뚫렸나 보다. 너무 고마워요 엄마.
-내가 그랬다. 유찬아, 할머니는 네가 엄마네서 지냈으면 좋겠어. 아빠는 이제 재혼해서 여자가 생겨서 그 여자한테 신경을 더 쓸 수밖에 없어. 그 여자가 아무리 잘해도 친엄마가 있는데 엄마랑 지내는 게 너한테 좋을 거 같다. 그랬더니 지도 안다고,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고. 네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먼저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그랬더니 알겠다고. 네 잘못 하나 없어, 다 니 애미, 애비가 잘못한 거야 그랬다 내가. 그니까 너도 이제 그냥 둬. 오면 오는갑다. 가면 가는갑다 그렇게 생각하고 너무 애쓰지 말어.
-알겠어요. 전화 오면 모르는 척 받을게. 진짜 고마워요 엄마. 미안하고.
-뭐 미안해, 밥이나 얼른 먹어.


결국 내가 맞았던 거다. 층간소음에 내면의 소음이 묻힌 게 맞았던 거다. 이제 해장할 준비가 된듯했다. 해장엔 콩나물국밥이지. 숙취는 하루가 다 지나가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허기도 채우고 해장도 하려고 집을 나선다.


다음날, 점심준비를 하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유찬이다.


-여보세요?
-엄마
-어, 말해. 무슨 일이야?
-어제 할머니께서 전화를 하셨어요.
-그래?


모르는 척 무심히 대답한다.


-그래서?
-죄송해요 엄마. 엄마 말이 다 맞아요.
-무슨 말? 내가 워낙 말을 많이 해서 무슨 말을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미 마음이 풀렸지만, 최대한 퉁명하게 대응한다.


-제가 준비가 안 됐다는 말이랑... 그냥, 다요. 이랬다 저랬다 해서 죄송해요.
-나도 미안해. 좀 지나쳤어. 엄마는 처음부터 네가 편하기를 바랐을 뿐이야. 그곳이 어디든. 그러니까 너무 급하게 결정하려고 하지 말고 조금 차분히 생각해 봐.
-네 엄마.


금방이라도 올 거처럼 이야기했지만, 전처럼 주말에 와서 지내고 돌아가는 패턴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다. 유찬이가 내 집에 왔으면 했던 이유는 조금이라도 편하게 쉬고 자신의 길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나, 어느새 그 마음은 나랑 사네, 안 사네로 변질되어 있었다. 나조차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었으니 말이다. 흔들리는 배의 중심의 중심을 잡기 위해 필요 없는 물건을 버려야 하는 거처럼, 요란하게 감정들을 들어내고 버림으로써 유찬이가 왜 우리 집에서 지냈으면 했는지에 대한 나의 첫 마음을 알아차렸다. 유찬이랑 어디서 지내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지내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나도 숨겨오기만 했던 마음을 드러내고 오랫동안 참아온 눈물을 토해내며 감정의 정산을 하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폭풍이 한차례 지나갔다.


#19
유찬이도 나도 이제 더 이상 어디서 지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처럼 주말이면 와서 지내다가 일요일 저녁 집으로 돌아갔다. 가야 할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꼬박꼬박 챙겨서 집으로 가는 꼴이 웃기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달라진 것이 있기는 하다. 우리 집에 유찬이 방이 생긴 것.

별일이 없으면 픽업을 간다. 이혼하고 초반에는 애들이 보고 싶으니까 무조건 내가 데리고 오고 데려다주고 했었다. 누군가 나에게 왜 혼자만 그렇게 하냐고, 당연하게 생각한다면서 혼자만 하려고 하지 말라고 나눠서 하라고 조언을 했다. 그럼에도 내가 데려오고 데려다주는 횟수가 월등히 많았다. 그러다 언젠가 애들 아빠가 데리러 온다고 해서 집에서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너무 힘들었다. 데려다주는 과정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도 하고 나름 헤어지는 준비를 했던 모양이었다. 혼자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마음을 추슬렀나 보다. 그날따라 집에서 아이들이 나가고 텅 빈 집에 혼자 남아 있는 것이 너무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때 결심했다. 나를 위해서 아이들 픽업을 내가 하겠노라. 헤어진 전 남편과 픽업밀당을 할 이유가 무엇인가 말인가? 아이들도 아빠가 온다고 하면 갑자기 정리해야 하고... 그래서 그때 이후로 웬만하면 내가 픽업을 한다.

보통은 토요일에 데리러 가는데 이번 주는 금요일에 와달라고 요청을 한다. 공부방 수업이 6시에 끝나니까 수업 끝나고 데리러 가겠다고 톡을 보냈다.
6시는 퇴근시간이라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두 배 정도 걸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업 끝나고 빠르게 뒷정리를 마치고 출발한다. 미리 나와 있으라고 했건만 도착해서 전화를 했다. 차에서 유찬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캐리어를 끌고 나온다. 뭐지? 차에서 내린다.


-뭐야? 웬 케리어야?
-엄마집에서 좀 지내려고요.
-뭐 얼마나 있을라고 케리어를 끌고 와. 일단 타.


다시 차에 타서 트렁크 문을 열어준다. 오면 오는구나, 가면 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집 앞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본다. 오늘 저녁과 주말 동안 먹을 먹거리, 간식등을 사기 위해서다. 넉넉히 장을 본다. 주말에 아이들과 먹고 남은 재료가 다음 주 나의 평일 먹거리 재료가 된다. 저녁은 된장찌개에 삼겹살로 정했고, 라면에 유부초밥, 카레, 양념해 놓은 춘천닭갈비, 그 외 여러 야채들. 유찬이가 좋아라 하는 감자과자들, 그리고 나의 맥주들.
저녁을 사 먹고 들어가면 좋으련만, 아빠랑 셋이 살면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싶은 마음들이 컸는지 한참 학교 다니면서 주말마다 올 때도 외식은커녕 집에서 주야장천 해 먹었다. 배달 음식은 가끔 시켜 먹어도 아이들은 외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알기에 힘들어도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려고 했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요리들도 아니다.

유찬이는 자기 방에 짐을 간단히 풀고 나온다. 장 봐온 것을 정리하고 있는 나에게 온다.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어, 거의 다 했어. 씻어. 그동안 저녁 준비하면 될 거 같아.
-그럼, 저 씻어요.


정리를 마무리하고 된장찌개 끓일 냄비에 물을 넣고 가스레인지에 올린다. 불을 붙이고, 재료들을 하나씩 꺼내서 싱크대 위에 두고, 아직 갈아입지 못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기 전에 유찬이 방을 열어본다. 전처럼 케리어를 열어놓고 옷가지를 양쪽에 나누어 넣어둔 게 보인다. 쓰던 화장품들은 책장 위에 잘 정리해 두었다. 유찬이의 마음을 엿보고 급히 옷을 갈아입으러 옷방으로 간다.
나도 오랜만에 고기를 먹는다. 혼자 된장찌개에 삼겹살을 구워 먹을 리 만무하다. 아들 덕에 나도 신나게 고기를 맛본다.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싶어도 혼자 먹기에 양도 많고 최소주문가격이 높아서 주말이나 돼야 누리는 호사이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야? 갑자기 케리어를 끌고 나타나길래 놀랐네.
-엄마네서 지내려고요.
-또 얼마나 있을라고?
-아마.... 쭉?
-쭉? 됐다. 가면 가는가 보다, 오면 오는가 보다 할 테니 니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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