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요즘은 나도 마음이 심란해서 잠을 깊이 자지 못하고 있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커피 한잔 마시며 잠을 깨는 게 낫다 싶었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생각에 잠긴다. 커피 향을 맡으며 문득, 결혼하고 처음에는 친정집이 더 편했던 기억이 난다.
결혼 전까지 함께 지낸 가족들 그리고 내 방. 친정집이 내 집 같고 신혼집이 아직은 낯선 느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싶은 순간이 온다. 내 집이 바뀌는 순간이다.
나와 비슷한 경험한 사람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집을 떠나 독립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어느 순간부터 어떻게 하면 층간소음을 해결할 수 있을까에만 몰두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층간소음 때문에 엄마네 머물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층간소음은 핑계일 뿐.
10년을 아빠와 살이를 같이 했으니, 아빠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야 하는 것에 대한 불안도 있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흐르자, 층간소음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아이의 행동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몸만 떨어진다고 독립이 아닌 거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서야 독립인 것을. 아빠가 재혼을 하지 않았다면 유찬이는 아빠랑 유준이랑 셋이 살면서 삶을 계획하고 스스로 때가 되었을 때 독립을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힘들어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도 아이와 함께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하려다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의도치 않게 일찍 깬 아침, 고요함 속에서 현상너머의 것을 알아차리는 선물을 받았다.
유찬이와 오늘 아침 나의 알아차림에 대해 이야기해 봐야겠다.
유찬이의 늦은 기상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을 따라 들어간다.
-유찬아, 정말 층간소음만 없으면 엄마네서 사는데 문제가 안될 거 같은 거야? 엄마가 아침에 갑자기 든 생각이...
-엄마 저 생각하기 싫어요. 생각하기 싫은데 엄마는 자꾸 질문을 해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아이는 대화를 거부했다. 아무것도 묻지 말라며 내 입을 막았다. 억지로 해봐야 서로 감정만 상할 것이 뻔하니 한발 물러선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생각에 더 확신이 생긴다. 유찬이와 이야기할 기회만 보고 있다.
저녁을 잘 먹고 들어간 아들이 쭈뼛쭈뼛 설거지를 마치고 식탁에 앉아서 쉬고 있는 나에게 온다.
-엄마, 저 집으로 갈게요.
진짜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두 번째라 마음이 덜 상할 줄 알았는데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거처가 바뀐 거니 적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고 아이를 다그치지 말자며 그렇게 나를 다독이며 기다렸건만, 막상 아이는 쉽게 선택하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고 행동한다고 생각하니 더 화가 났다.
캐리어 가방을 풀지 않고 지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너무 쉽게 결정하고 말하는 거 아니야? 엄마 생각은 안 하니? 방까지 옮기자고 한건 그래도 이번엔 적응해 보겠다고 마음먹고 온 거 아니었어?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럼, 무슨 생각으로 온 거야?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내가 층간소음에 대해 아무것도 시도해보지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뭐라도 했어야 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온 거였어요.
-정말 층간소음이 문제인 게 맞아? 엄마가 볼 때는 네가 아직 독립할 준비가 안된 거 같은데.
-독립이요? 아빠한테서 엄마한테로 온 건데 어차피 독립이 아니잖아요.
-엄마가 말하는 독립이라는 게 아직 네가 아빠와 떨어질 준비가 안된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는 거야. 며칠 전에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생각하기 싫다고 하니 기다렸건만... 뭐? 집으로 다시 간다고?
-모르겠어요. 그냥 전 이 모든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드러나는 문제 말고 네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봤으면 하는 거야 엄마는.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거야.
-그놈의 마음! 마음! 마음! 난 모르겠다고요. 그냥 난 좀 편하게 쉬고 싶어요 엄마.
-다시 돌아간다고 편안해지는 것도 아니잖아!
‘지 아빠랑 똑같네 똑같아. 어쩜 저렇게 지 아빠가 나한테 마음 쓴 딱 그만큼만 쓰네. 나한테만 야박한 새끼들. 남편 복 없는 사람 자식 복도 없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네. 지들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들.’
내 안에서 떠드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유찬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일어나서 자기 방으로 간다.
-그래, 그럼 네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그 마음이라는 것은 집어치우고!
들어가다 말고 자기 방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너무 쉽게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 아니야? 여기가 엄마집이 아니라 만약에 다른 지역에 대학을 다니게 돼서 자취방을 얻었다고 하면, 너 그렇게 쉽게 정리하고 다시 집으로 갈 수 있어? 돈이 걸려있으니 힘들어도 견디지 않겠어? 누구나 거처를 옮기면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려. 내가 오라고 했어? 네가 선택해서 와놓고 지금 이런 식으로 자꾸 왔다 갔다 하면 엄마도 혼란스러워. 아님 그냥 저쪽 집에 적응하도록 해보던가. 엄마가 우스워? 네 마음대로 그렇게 해도 되는 그런 사람이야?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일은 너랑 아빠가 만들고 왜 내가 그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데? 아빠는 엄마 때문에 이혼했다고 그러지?
-아니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아빠는 가정을 지키려고 했다고 했어요.
-뭐? 가정을 지키려고 했다고? 엄마한테 전화해서 첫마디가 이혼하자라고 한 사람이 그게 가정을 지키겠다는 사람이 할 소리야? 웃기도 있네 진짜. 자기 하나 믿고 연고도 없는 곳에 데리고 와서는 돌보지도 않은 사람이야. 이혼하고도 내가 여기서 이렇게 니들 곁에 있으니까 우습나 보지? 너도 똑같아. 다 필요 없어. 갈 거면 지금 가! 며칠 더 있는다고 뭐가 달라져? 그리고 너 오늘 가면 다시는 안 봐. 유준이도 너도 안 봐.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마음의 소리를 거르지 않고 뱉는다. 처음이었다.
유찬이도 놀라서는 다시 식탁으로 와서 앞에 앉는다.
-왜 그래요, 엄마?
-뭘 왜 그래? 엄마는 이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알고 가. 유준이도 너도 엄마에 대한 마음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데, 엄마도 이제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
-명절 때 외갓집을 가는 거죠?
-그게 뭐가 중요해? 그렇게 외가댁이 중요한 곳이었어? 아니, 오늘 너 가고 나면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말씀드릴 거야. 애들 이제 안 볼 거라고. 그런데 할머니가 어떻게 그러냐고 하시면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 안 볼 거야.
-외가댁도 못 가는 건 안 돼요. 그럼 저 그냥 있을게요.
-뭐? 그럼 집으로 가도 전처럼 지낼 수 있다고 하면 갈 거고?
-네.
-그니까 넌 가고 싶은 거잖아. 단지 엄마가 협박을 하니까 있겠다는 거잖아. 더 비참하다 유찬아. 내가 지금 너하고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진짜!
얼마나 후회를 하려고 이러고 있는 건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협박을 했다. 내 말 안 들으면 네가 좋아하는 그 무엇인가를 뺏을 거야라는 식의 협박대화.
처음이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거르지 않고 뱉어낸 것이. 거침없이 쏟아내는 내 말들에 유찬이는 울지조차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가서 짐 싸.
난 마음을 강하게 먹는다.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유준이 입장에서는 날벼락같을 수도 있겠지만, 그놈도 똑같다. 이젠 더 이상 나도 아프고 힘들고 싶지 않다. 오늘 돌아가는 아들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30분 동안 침묵이 흐른다. 말해봐야 좋은 이야기가 나올 거 같지 않다. 그래서 그냥 꾹 입을 닫았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해서 같이 내렸다.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고서 운전석 쪽에 서 있는 나를 본다.
-유찬아, 연락하지 마.
-엄마, 저 엄마 없으면 못살아요.
-이제 난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연락하지 마.
유찬이의 대답을 듣지 않고 차에 탄다. 정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꼬장이다. 끝까지 난 협박을 하고 돌아선 것이다. 비겁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아이들은 내가 없어도 잘 살 것이다.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이 더 슬프다.
눈물이 흐른다. 마음이 아프다. 거르지 않고 유찬이에게 쏟아부은 말들이 벌써 후회된다. 울지도 못하던 유찬이 얼굴이 생각난다. 유찬이 유치원대부터 알고 지낸 지현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술 한잔하자고 하니, 언니는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알겠다고 한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아들 앞에서는 강한 척 큰소리쳤지만, 너무 감정적이었던 나는 이미 자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