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유찬이는 2주 만에 다시 짐을 싸서 왔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금방 돌아올 것을 왜 저렇게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지 원.
나와 꼭 함께 살자는 게 아니다.
물론 같이 지낼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저 유찬이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을 찾기를 바랄 뿐이다.
진짜 내 마음은 그러한데 아이의 선택과 행동에 나의 인내심의 한계를 보게 되니, 나도 내 마음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하지만 그건 내가 처리해야 하는 감정이고 지금은 아이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방을 옮기는 거 어때?
-그렇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겠어요?
-네 말대로 생활소음이 이방이 가장 큰 거 같더라고. 너 가고 나서 이방에 있어보니까 정말 그렇더구먼. 엘리베이터 소리도 그렇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도 그렇고 배수관 물 내려가는 소리며... 중간방으로 옮기자.
-생각해 볼게요.
사실 옮기자고 내가 제안을 하기는 했지만 옮기자고 한 방에는 시스템 행거가 있다.
설치기사님이 오셔서 해주신 거라 내가 옮길 수 있을까 싶었지만, 사람이 못할 것이 뭐가 있으랴.
그렇다고 설치기사님을 요청하자니 이래저래 번거롭고 날짜도 맞춰야 하고, 하면 하는 거지 라는 근본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좀 편하게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다음날 아침, 아들은 조심스럽게 방을 바꾸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행거의 걸린 옷들을 다 빼서 안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둘 다 마스크를 끼고 말없이 옷을 날랐다. 옷만 빼냈을 뿐인데 벌써 힘이 든다.
옷과 수납장을 방에서 빼고 행거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분해하면 아들이 설치할 작은방으로 가져다 놓았다. 결합 나사를 풀어 바지 주머니에 하나씩 넣었다.
그렇게 중간방을 비우고, 청소기를 둘리고 걸레질을 했다. 둘 다 아무 말이 없다.
작은방에 있던 물건들을 빼왔다. 책장과 책상, 매트리스, 그리고 캐리어 하나.
캐리어의 옷을 꺼내서 정리하라고 했더니 그냥 이렇게 케리어에 두고 쓰는 게 편하단다. 뭔지 모르게 싸했다.
-며칠 여행을 가도 케리어에서 짐을 꺼내서 정리해 놓고 지내는데 그냥 캐리어에 두고 지내겠다고?
-이게 마음이 편해요. 짐을 다 꺼내놓는 게 좀 부담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냥 이렇게 둘게요.
언제든 떠날 거예요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옷장 삼아 쓰던 캐리어를 볼 때마다 싸한 기분을 느껴진다.
유찬이는 옮겨진 방을 정리하고, 나는 행거를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다.
혼자 살면서 도움을 받는 거보다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던지라 도와달라고 할 생각을 못하고 낑낑대며 하다가 혼자서 뭐 하는 건가 싶어서 아들을 불렀다.
힘들긴 했지만 오히려 옮기고 나니 옷방이 자기 방을 찾은 느낌이 든다.
#15
친정엄마는 유찬이와 함께 지내게 되어 너무 좋아하신다.
5일 만에 다시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는 말은 전하지도 않았다.
좋은 일도 아니고, 물어보시면 다시 자기 집으로 갔다고 그때 말하자 싶었다. 이렇게 다시 유찬이가 오고 나니 굳이 말씀 안 드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항상 혼자 사는 딸이 걱정이시다. 다 큰 아들이 와있기로 했다고 하니 든든하다고 하셨다.
사실 유찬이에게 엄마네 와서 지내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 덕분이다.
내가 지내고 있는 집은 부모님께서 월세를 놓고 계시던 집이었다.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가까이서 지내며 챙기라고 집을 내어주신 거다.
그렇다고 내가 용돈을 드릴 수 있는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
염치는 없지만 나도 아이들 곁에 있고 싶었기에 못 이기는 척 그렇게 살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아이들과도 주말마다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공개수업등 학교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도 말해주었다. 엄마가 너희들 가까이에서 지낼 수 있는 것은 할머니 덕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항상 엄마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려 노력한다.
내가 엄마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엄마 덕분이라고.
#16
방을 옮기고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층간소음에 뚫린 귀는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때쯤은 나도 전에는 신경 쓰이지 않았던 윗집의 아이들 소리, 개 짖는 소리, 걷는 소리가 들린다.
아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올라가서 싸워야 하는 건가? 난 분쟁이 싫다. 그래서 참는 것을 선택하며 살았다. 유찬이에게 엄마는 싸우는 게 싫으니 참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유찬이가 ‘엄마가 좀 해결해 주세요’ 하는 것도 아니다.
아들이 원한다면 올라가서 싸워보겠노라, 나는 못하지만 엄마인 나는 할 수 있을 테니까.
-엄마 관리사무소 전화번호 아세요?
-저장해 놓은 거 있을 거야. 왜?
-상황 봐서 민원 넣어보려고요.
수업을 하는 동안 몇 번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넣은 거 같았다. 하지만 크게 개선되지는 않았다.
오후에 한 두어 시간 아이들의 쿵쿵거림과 저녁에는 가끔 걸을 때 들려오는 방망치소리.
-엄마, 관리사무소에 전화하는 것도 별로 효과가 없어요. 쪽지를 써서 붙여 놓는 건 어떨까요?
-나쁘지 않은 방법이네.
저녁을 먹고 윗집 문 앞에 붙일 메모를 작성한다.
안녕하세요, 아래층에 사는 학생입니다.
아이들이 낮에 하원하고 한 시간 이상 소음이 심합니다.
저녁에는 어른 걸어 다니는 발소리가 크고요.
조금만 조심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010-OOOO-OOOO
한참 저벅저벅 소리가 들렸고,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이다.
윗집으로 올라가서 대문에 메모를 붙이고 돌아왔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르는 번호가 전화가 온다.
막상 전화가 오니 핸드폰을 들고 나를 쳐다본다. 내가 받으라고 눈짓을 했다.
-여보세요.
-관리사무소에 전화한 것도 그쪽이에요?
아니 애들은 8시면 자고 저녁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거예요?
전화기 너머로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갓 20살이 된 아들은 살짝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한다.
-걸어 다니실 때 소리가 좀 크게 들려서요. 실내 슬리퍼라도 좀 착용을 해주셨으며 해서요.
-슬리퍼 신고 다니거든요.
이번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유찬이에게 전화기를 달라는 손짓을 보낸다.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저의 아들이 재수생이에요. 집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아이들 하원하면 좀 심하게 시끄럽기도 하고, 저의 집이 워낙 조용해서 조금 조심해주셨으면 해서 고민하다가 메모를 붙인 겁니다.
-저희도 관리사무소에서 전화받고, 아이들 일찍 재우고 저희도 신경을 쓴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저도 애들 키워봐서 이해는 합니다. 한데 낮에 심할 때가 종종 있어요. 아들이 집에서 공부하다 보니 저녁에는 조용하니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거처럼 느껴졌습니다.
-잠깐 쓰레기 버리고 들어오는데 메모가 붙어 있어서 좀 당황스러워서 바로 전화를 드렸네요.
전화를 끊은 나에게 유찬이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슬리퍼를 신고 다닌대요. 그 발망치 소리는 슬리퍼를 신은 소리가 아닌데”라며 절망스러운 표정이다.
그래도 자기가 하려고 했던 것을 실행한 것만으로도 미련은 없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