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가 조금 넘은 시간. 저녁 먹을 준비를 한다. 자고 일어난 유찬이가 샤워를 하는 동안 된장찌개를 끓여놨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버너에 고기 굽기 팬을 올려놓았다. 각종 야채와 쌈장등도 놓고, 전자레인지로 햇반을 돌린다. 숟가락 젓가락은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두고 간 것들로 세팅한다. 통유리 밖으로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다.
아이들은 주중에 먹지 못한 내 사랑과 음식을 엄마네 와서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어디를 가자고 한 적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밖에서 고기를 구워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원래 소고기는 맛있기도 한데 이렇게 새로운 장소에서 먹으니 더 맛있다. 양이 절묘하게 맞았다. 살짝 모자라다 싶을 때 돼지고기로 마무리를 했다. 된장찌개에 밥으로 마무리.
크게 설거지 거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치워야 할 것들 두고 여유를 부려본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무슨 영화를 볼지 이야기한다.
-영화 보고 싶은 게 있어?
-딱히 보고 싶다 그런 건 없어요.
-나도 없는데. 공포는 싫어. 해가 지니까 여기 자체도 좀 무서운데 무서운 영화는 더 싫다.
-저도 공포는 싫어요. 인사이드 아웃 1 볼까요?
-그럴까? 본 지도 오래됐고, 최근에 2를 봤으니까 왠지 더 이해되는 부분이 있을지도.
-엄마 보고 싶은 거 없으면 그걸로 하시죠.
-오케이
나는 저녁 먹은 것들을 치우고 유찬이는 이불을 깔고 팝콘과 맥주, 자신이 먹을 음료수를 세팅했다. 그리고 함께 빔을 설치했다. 처음 야외에서 빔을 설치해서 보는 거라 스피커나 화면에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으나, 오래전 자동차 극장이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밤이 되니 더욱더 조용하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맥주도 한잔 했겠다, 영화도 끝났겠다, 잠이 오기 시작한다. 빔을 정리하고 잘 준비를 하고 누워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금방 잠에 빠질 것만 같았다.
소변이 마려워서 잠이 깼다. 옆을 보니 유찬이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유찬이에게 “뭐 해? 너무 늦게 자지 말고”라고 말을 건네고 다시 잠을 청했다.
뒤척이다 실눈을 떠보니 여전히 유찬이는 엎드려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 한숨이 나왔다. 잠을 못 자는구나 싶었다. 이번엔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바닥에서 자다 보니 잠이 잘 들긴 했지만 불편했는지 깊이 자지 못하고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유찬이는 깨어있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핸드폰을 보고 있는 유찬이를 보니 화가 났다.
-너 뭐야? 안 잔 거야? 미쳤나 봐.
-빗소리랑 가끔 지나가는 차소리 때문에요.
-나 너 독립하는 거 반대야. 너 혼자 있으면 더 위험해. 안돼. 층간소음이 문제가 아니야. 여기는 아파트에 비하면 엄청 조용한 곳인데, 빗소리랑 한밤중에 지나가는 차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다니? 내려와 보길 잘했네. 독립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지금 독립하는 걸 반대한다는 거야. 너 엄마가 뭐 하지 말라고 하는 거 본 적 있어? 근데 이 상태로 독립하는 건 안돼!
너무 충격적이었다. 독립하는 게 유찬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내 촉을 믿는 편이다. 하지만 가끔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강요가 될 수도 있기에 조심한다. 그래서 나도 유찬이도 함께 간접 경험을 해보고자 현주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이제 난 확신한다. 지금 혼자 지내게 하는 건 유찬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심각하게 구는 나에게 유찬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3 때 이미 반을 바꾸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녀석이 같은 선택을 하는 거처럼 느껴져서 더 화가 나는 거 같았다.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곳에 온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제 아침 먹고 집으로 가서 남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사놓은 라면으로 아침을 가볍게 먹고 방갈로를 정리했다. 다행히 비가 그쳤다. 비가 온 하늘을 맑고 상쾌하기까지 했다. 여기 와서 방갈로에서만 있다가 가는 것도 웃겨서 현주에 물어보니 가까운 곳에 계곡이 있다고 했다. 유찬이도 가는 길이면 들렸다가 가자고 해서 계곡으로 향했다.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아침에 열받은 것도 날아가는 듯했다. 비 온 뒤라 방문객이 거의 없었다. 계곡으로 가는 길이 산책로처럼 걷기에 너무 이쁘다. 나무와 한산한 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계곡에 발을 담글 것도 아니고, 중간쯤 갔다가 내려왔다. 점심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먹기로 하고 집으로 출발했다. 유찬이는 출발하자마자 잠이 들었다.
#25
유찬이 고3 때 한참 반에 틱 있는 친구 때문에 불안하다고 했을 때, 한 달 정도 신경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아먹은 적이 있었다. 상담도 받아보았지만, 크게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내가 다녔던 신경정신과에 갔었다.
그때도 내가 다녔던 곳이라 다른 데 가고 싶다고 해서 다른 곳을 알아보았다. 동네 작은 신경정신과였지만 의사 선생님이 너무 괜찮았기에 추천한 건데 뭐가 맨날 싫은 건지. 인터넷으로 찾아서 여기 어때? 저기 어때?라고 보내면 다 싫다고만 하니, 나도 더 이상 찾아서 대령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 더 이상 병원 안 찾을 거야. 네가 찾아봐.
아니 엄마가 다닌 데고 선생님이 너무 괜찮아서 한번 보라는 건데, 진료 보고 나서 싫다고 해도 되는 건데 무조건 싫다고만 하면 어쩌냐고?
-알겠어요. 한번 가볼게요.
유찬이가 먼저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다음에 들어갔다. 불안이 높다고 하시면서 무조건 참는다고 좋아지는 게 아니니 약을 좀 먹으면서 불안도가 낮아지면 생각 좀 더 유연해질 거라고 하셨다. 유찬이가 그렇게 해보겠다고 해서 한 달 정도 복용했었고, 그게 1년 전쯤이다.
사실 현주네 가기 전에 유찬이가 상담센터든 병원이든 도움을 받아야 될 거 같다고 했다. 그 말이 나는 반가웠다. 상담은 마음의 응어리를 푸는데 필요할 듯했고, 병원은 필요하다면 1년 전처럼 약을 먹어 불안도를 떨어뜨리면서 작업한다면 유찬이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담이나 신경정신과는 본인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진행하기가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상담을 꾸준히 받아보자는 취지로 괜찮은 곳을 찾기 위해 몇 군데 가봤지만 유찬이는 마음에 드는 곳이 없다고 했다. 막상 상담받을 곳을 정하기 위해서 알아보러 다니다 보니 꼭 상담을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나는 알 거 같았다. 자신에 대해서 수없이 질문하고 답을 탐구하는 아이이기에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상담이 아니라 불안도를 낮춰 줄 수 있는 약을 처방받을 수 있는 병원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내 머리를 쳤다. 유찬이는 지금 아픈 거구나 라는 생각이 명확했다. 내가 혈압이 높다고 생각으로, 마음으로 혈압을 낮춰야지 낮춰야지 한다고 낮춰지는 것이 아닌 거처럼 말이다.
-유찬아!!! 너 상담이 아니라 병원을 가는 게 맞는 거 같아.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샤워하고 있는 아들에게 화장실 문 밖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너무 맞는 말이라 지금 안 하면 안 될 거 같은 생각에 앞 뒤 안 가리고 말을 뱉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들이 식탁에 앉아 있는 내 앞에 와서 앉는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병원에 가야 할거 같다고도 말했잖아요.
-상담보다 그게 먼저라고. 사실 상담은 엄마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담선생님들이 하는 질문들을 내가 너에게 자주 했어.
-맞아요. 상담센터 가서 이야기하다 보면 그런 거 느껴요.
-그렇지? 그래서 그게 급한 게 아닌 거야. 전에 먹었던 그 약 괜찮았지?
-괜찮았어요.
-근데 그때 왜 그만 먹은 거야?
-한 달 정도 먹고 나니까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안 먹었어요.
-그럼 그 병원 다시 가보는 거 어때?
-다른 데 가보고 싶은데...
-어디 알아본데 있어?
-아니요, 이제 알아봐야죠. 엄마가 같이 알아봐 주시면 안 될까요?
그냥 다녔던 병원에 가기를 바랐지만, 다른 곳에 가보고 싶다니 검색을 시작했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어서 예약 전화를 했더니 두 달 후에나 예약이 된다고 한 것이다.
-엄마 예약을 잡기는 했는데, 두 달 후예요. 8월 8일.
-대박! 두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아니 지금 당장 힘든 건데 너무 길다.
그럼 예약은 된 거니까, 전에 다녔던 병원에 가서 상담받고 약 처방 해주시면 먹다가 예약날 돼서 그 병원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그렇게 1년여쯤 지난 어느 날, 다시 신경정신과를 방문하게 되었고 불안을 낮추기 위한 약을 처방받았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심장에 무리가 되는 운동이나 활동을 조심한다. 골절이 생기면 뼈가 붙을 때까지 깁스를 한다. 감기가 걸리면 약을 먹고 쉰다. 눈에 보이는 질병들은 상황에 맞춰 치료를 하면 된다. 하지만 마음의 병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내가 우울하다면 우울한 거다. 내가 불안하다면 불안한 거다. 우울이나 불안은 의지로 이겨낼 수 있다고 배웠고 그래야 한다고 나 스스로 믿었던 거 같다.
열이나 혈압을 내 의지로 낮추지 못하는 것과 우울이나 불안이 심해지면 의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치료를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고, 그래서 아이가 힘들다고 할 때 망설임 없이 가자고 할 수 있었다.
다시 약을 먹기 시작한 지 2주쯤 되었을 때, 엄마집에서 나가야 할거 같다고 했고, 현주네까지 함께 다녀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