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내가 애틋하고 잘 되길 바래요.

픽셀의 속도에 길을 잃지 않는 법

by 두유진
출처 https://youtu.be/CQULBVeTPwY?si=0Ra1xHTXXxZvIth-

“나는 여전히 내가 애틋하고, 잘 되길 바래요.”

— 또! 오해영

꽤 오래된 드라마다.

오해영의 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 부분을 다시 듣기도 한다.


이토록 조용한 문장 안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솔직한 바람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더 잘나고 싶다는 욕심도, 남들보다 앞서고 싶다는 다짐도 아니다. 그저 나 자신이 애틋하고, 잘 되길 바라는 마음. 우리는 언제부터 이 마음을 이렇게 어렵게 꺼내야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인류는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안갯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AI는 더 이상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 속도와 판단 능력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새로운 문명의 문을 열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더 빨리 이해하는 사람’, ‘더 많이 아는 사람’, ‘남들보다 앞서가는 사람’을 기준 삼아 살아왔다. 정복하고, 비교하고, 따라가는 방식으로 삶의 방향을 정해왔다.


하지만 AI의 등장은 이 익숙한 기준을 무너뜨린다.

더 빠른 계산, 더 정확한 기억은 더 이상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간이 자부해 왔던 ‘지능’의 영역은 가장 먼저 기계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문 앞에 서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 앞에서 오히려 속도를 더 높인다.

더 배워야 할 것 같고, 더 뒤처지면 안 될 것 같고, 가만히 있으면 사라질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 속도는 이미 인간의 인지 능력을 훨씬 넘어섰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픽셀의 세계를, 육체의 속도로 따라가려는 시도는 결국 자기 소진으로 끝난다.


<삶을 바꾸는 비결> (조혜연 나비다) 책을 또 열어본다.

144쪽 쉬면 불안한 나, 잘 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쉬기로 결정했다면 외부와의 정보는 차단하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쉬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쉬지 못해서 지쳐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외부를 살피고

타인의 속도와 성과를 기준 삼아 자동 점검하는 삶.

이것이 의미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추격이 아니라 애틋한 내 삶에 맞는 다른 방향이다.

정복이 아니라 따뜻한 관계,

비교가 아니라 내 삶의 맥락,

따라가기가 아니라 나에게 맞는 선택.


모든 주도권을 다시 나에게로 돌려놓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시대의 삶을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속도가 빠른 시대에

내 삶의 속도도 빠르게 소진시킬 의미는 없다.

그러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나 애틋하고 소중하다.


삶은 언제부터인가 ‘관리해야 할 프로젝트’가 되었다.

일정은 최적화되고, 감정은 조절되어야 하며, 실패는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효율적으로 설계된 삶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길을 잃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 아무 일도 없는데도 자주 무너지는 마음.


그것은 우리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몸과 떨어진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AI와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역설적으로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몸’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다.

몸의 감각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생각은 복사될 수 있어도, 감각은 대체되지 않는다.

정보는 요약될 수 있어도, 마음의 떨림은 전송되지 않는다.


삶이 바뀌는 순간은 거창한 결단에서 오지 않는다.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듣는 순간,

지금 이 선택이 나를 살리는지, 소진시키는지 감각으로 알아차리는 순간,

그때 삶은 방향을 바꾼다.


진정한 생존은 기술의 백과사전을 외우는 데 있지 않다.

자전거를 타며 넘어지고, 다시 균형을 잡아가듯

실수 속에서 나만의 리듬과 직관을 기르는 일,

내 삶의 핸들을 다시 내 손으로 쥐는 일에 가깝다.


앞으로의 세계에서 가장 무의미해질지도 모르는 단어는

‘정복’, ‘비교’, ‘따라가기’ 일 것이다.

대신 더 중요해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어떤 리듬으로 살고 싶은가.

어떤 관계 안에서 숨이 트이는가.

무엇을 할 때 내 몸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가.


Christina's World is a 1948 painting by American painter Andrew Wyeth

이 그림은 불안전한 몸으로도 삶을 행해 나아가는 의지를 담고 있다.

빠르지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지만 그 방향만은 분명하다.

삶은 때로, 이렇게 기어가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존엄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속도의 경쟁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이 땅,

내 숨소리,

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타인과 나누는 온기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애틋하고, 잘 되길 바라요.”

이 문장은 자기 연민이 아니라 자기 존중의 선언이다.

이 마음을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AI라는 거울 앞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속도가 아닌 감각으로,

정보가 아닌 삶으로,

정복이 아닌 공생으로 돌아가는 것.


그 방향이야말로

가장 똑똑한 기계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존엄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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