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시킬 용기

가면

by 한가을

습관처럼


엘리베이터 앞

문을 잡아주지 않고 쌩하니 올라가 버린 앞사람에게 화가 났다가도, 금세 '무슨 급한 일이 있었겠지'라며 스스로를 타일렀습니다.


점심시간

매운 걸 못 먹으면서도 다들 마라탕을 먹자기에 "좋아해요"라며 웃어버렸습니다.


회의 시간

꽤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지만, 혹시나 튀어 보일까 봐,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보며 말합니다.


"너는 참 성격이 유해."

"너처럼 배려심 깊은 사람은 드물어."


그 칭찬을 들을 때면 안도감이 들면서도

돌아서는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초라하고 씁쓸합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작은 목소리를 당신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착한 게 아니야.

그냥 거절했다가 미움받는 게

죽기보다 무서운 겁쟁이일 뿐이야."


당신의 배려


아프지만 솔직해져야 합니다.


상사의 기분을 살피고

친구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진짜 이유는 상대방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그 부탁을

거절했을 때 돌아올 차가운 공기

상대의 미간이 찌푸려질 때 느껴지는

그 서늘한 공포를 견딜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밑바닥을 들춰보면

그것은 유기 공포의 다른 얼굴입니다.


마치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이 살아남기 위해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것처럼, 당신의 친절은 갈등 상황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가장 안전한 방패인 셈입니다.


가짜 나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눈치를 보는 어른이 되었을까요?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코트는 그 기원을 어린 시절의 거짓 자아에서 찾습니다. 아이가 투정을 부리거나 화를 낼 때, 양육자가 받아주지 않고 비난하거나 차갑게 돌아섰다면, 아이는 본능적으로 깨닫습니다.


'아, 내 진짜 모습을 드러내면 버림받는구나.'

'엄마가 원하는 착한 모습을 연기해야만 안전하구나.'


그때부터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지우고 타인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생존 전략을 습득했습니다.


지금

눈치를 보는 건

당신이 바보 같아서가 아니라


어린시절

살아남기 위해

뼈저리게 익힌 생존 기술이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마음 속 레이더


이 치열한 생존 기술 덕분에

센스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 대가는 혹독합니다.


당신의 마음속엔

24시간 꺼지지 않는 레이더가 돌아갑니다.


"저 사람 기분 나쁜가?"

"내가 말실수했나?"


문제는 이 레이더가

오로지 타인만을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기분은 귀신같이 감지하면서, 정작.

"그래서 지금 내 기분은 어떤가?"

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신호도 잡히지 않습니다.


타인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느라

내 마음의 방은 주인을 잃고 텅 비어버린 것입니다.


실망시킬 용기


이 지독한 가면 무도회를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갑자기

"싫어!"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타인을 실망시킬 수 있는

작은 용기를 내보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건 신도 못 하는 일입니다.


당신이 거절 했다고 떠나갈 사람이라면

그 관계는 이미 당신의 희생을 먹고 자란 기형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 관계는 붙잡고 있을수록 당신만 병들게 합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제가 좀 힘드네요."


이 한마디를 뱉었을 때

상대가 실망하는 눈빛을 보내더라도 버텨내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할 최소한의 비용입니다.


당신은 충분합니다


오늘 하루

타인의 표정을 살피느라

소진된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그 섬세하고 예민한 레이더를

이제는 남이 아닌 자신에게 돌려주세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대신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라고 물어봐 주세요.


착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눈치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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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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