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나
요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름보다 먼저 묻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마치 서로의 바코드를 스캔하듯,
알파벳 네 글자를 확인하고 나면 우리는 안도합니다.
“아, T(이성형)시구나.
어쩐지 논리적이시더라."
“I(내향형)니까
혼자 있는 거 좋아하시겠네요.”
그 짧은 순간
복잡하고 알 수 없던 타인은 16개의 카테고리 중 하나로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혈액형으로 성격을 나누던 시절을 지나
이제 우리는 훨씬 더 정교하고 과학적이라 믿어지는 틀 안에 서로를 가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소개서에 자신의 MBTI를 적어내며,
성격조차 하나의 스펙이자 기능 설명서처럼 제출합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서로를
그리고 나 자신을 규정하고 싶어 하는 걸까요?
그것은 단순히 재미 때문이 아닙니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를 설명할 언어를 잃어버린
우리들의 슬픈 자기 증명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 바쁩니다.
그리고 너무 지쳐 있습니다.
누군가를 깊이 들여다보고, 겪어보며
그 사람의 고유한 결을 알아갈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효율을 택했습니다.
마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대신 요약본을 보듯 우리는 타인을 라벨링하여 빠르게 파악하려 합니다.
“이 사람은 ENFP니까 나와 잘 맞겠네”
“저 사람은 ISTJ니까 일할 때 깐깐하겠네.”
이 인간관계의 가성비 추구는 실패 비용을 줄여줍니다. 맞지 않는 사람에게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효율성 뒤에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경험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버리는 관계의 빈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는 법을 잊어가는 것입니다.
MBTI 열풍의 진짜 원인은
타인이 아닌 ‘나’를 향해 있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내가 설 자리는 좁아지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MBTI는 아주 명쾌한 답을 내려줍니다.
“당신은 잔다르크형입니다.”
“당신은 용의주도한 전략가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바넘 효과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특성을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믿으며 심리적 안정을 얻는 것이죠.
이 명명은 강력한 위로가 됩니다.
내가 사회 부적응자가 아니라
단지 INTP라서 그런 것이라는 안도감.
나의 게으름이나 예민함이 결함이 아니라
내 성격 유형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합리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기에
외부의 권위 있는 검사 결과가 나를 정의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도구를 이해의 수단이 아닌
한계의 감옥으로 써버릴 때 발생합니다.
“나는 원래 P라서 계획을 못 세워”
“나는 F라서 감정적이야.”
성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과 경험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되는 스펙트럼입니다.
하지만 과몰입은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스스로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그 라벨에 맞춰 행동을 제한해 버립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낙인 효과를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셈입니다.
성격을
스펙처럼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성장할 기회를 잃습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면 기르려 노력하는 대신
“난 원래 T잖아”라고 회피해 버리는 태도는
쿨한 것이 아니라 비겁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좁은 방 안에 가두는 일입니다.
재미로 보는 것은 좋습니다.
나를 이해하는 도구로 쓰는 것도 현명합니다.
하지만 그 네 글자가 당신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때로는 내향적이지만 친한 친구 앞에서는 누구보다 수다스러울 수 있고, 지극히 감성적이지만 일할 때는 냉철할 수 있는 입체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설명하는 것은
MBTI 검사 결과지가 아니라...
오늘 하루
내가 타인에게 건넨
내가 선택한 행동. 그리고,
내가 견뎌낸 시간들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 좁은 박스 안에
당신의 거대한 우주를 구겨 넣지 마세요.
당신은
라벨로 요약될 수 없는
그 자체로 고유하고 복잡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글이 필요한 누군가가 생각나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