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만 탈래요

by 한가을

“우리 무슨 사이야?”


요즘 연애 시장에서

가장 촌스럽고 눈치 없는

질문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우리 무슨 사이야?”입니다.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팽팽하게 유지되던 로맨틱한 긴장감은 깨지고

상대는 부담감을 느끼며 뒷걸음질 칩니다.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주말마다 연락을 주고받지만

누구도 서로를 연인이라 정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썸이라 부르고

서구권에서는 시추에이션십이라 부릅니다.


상황에 따라 연인인 척하지만

관계의 의무는 지지 않는 모호한 상태를 뜻하죠.


“사귀는 건 무겁고, 혼자는 외로워요.”

이 모순적인 문장 속에 우리 시대 청년들의 빈곤한 마음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습니다.


온기는 필요하지만

그 온기를 유지하기 위한 땔감을 구할 여력은 없는 상태.


그래서 우리는 책임 없는 친밀감이라는

달콤하지만 영양가 없는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가성비 사랑


과거에 연애와 결혼은

거친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갈 보험이자 안전기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청년들에게 깊은 관계는

내 시간과 감정, 그리고 돈을 갉아먹는 막대한 비용으로 인식됩니다.


이미 취업난과 경쟁으로 자아 고갈 상태인 그들에게

타인의 삶을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연애는 사치입니다.


기념일을 챙기고

감정 다툼을 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과정은 너무나 피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를 구독하듯 소비합니다.


필요할 때만 접속해서 설렘을 느끼고

부담스러워지면 언제든 구독 취소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상태.


썸은 사랑의 가성비를 극대화한 형태이자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고안된 가장 안전한 시스템입니다.


얄팍한 수심


심리학적으로 볼 때, 썸만 타려는 심리 기저에는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회피형 애착 성향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깊어진다는 것은

나의 가장 취약한 밑바닥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찌질한 모습, 열등감, 상처까지 공유해야 하죠.


하지만

완벽한 나를 전시하는 데 익숙한 SNS 세대는

타인이 나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실망하고

떠날 것이라는 뿌리 깊은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관계의 수심을 얕게 유지합니다.


발목 정도만 오는 얕은 물에서는 첨벙거리며 놀다가도 파도가 치면 금방 뭍으로 도망칠 수 있으니까요.


깊은 바닷속에만 있는 보물은 포기하더라도

익사할 위험만은 피하고 싶은 생존 본능이 사랑 앞에서도 작동하는 것입니다.


도파민 유목민


썸의 가장 큰 특징은 불확실성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모르기에 긴장하고, 연락 하나에 희비가 엇갈립니다. 이 과정에서 뇌는 쾌락 호르몬인 도파민을 뿜어냅니다. 자극적이고 짜릿합니다.


반면, 안정적인 연인 관계에서 나오는 호르몬은 옥시토신입니다. 신뢰, 유대감, 평온함을 주죠.


하지만

옥시토신을 얻으려면 지루함과 권태

그리고 갈등이라는 터널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도파민에 중독되어

옥시토신이 주는 깊은 위로를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설렘만 취하고 책임은 버리는 관계는

마치 탄산음료처럼 마실수록 갈증만 더해질 뿐입니다.


영혼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은 채

더 자극적인 썸을 찾아 헤매는 관계의 유목민이 되어갑니다.


상처받을 용기


안전한 사랑이라는 건 세상에 없습니다.

모든 깊은 관계는 필연적으로 상처를 동반합니다.


내가 나의 빗장을 풀고 누군가를 내 세계 안으로 들여놓는데, 어떻게 흠집 하나 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 흠집과 균열 사이로

비로소 서로의 빛이 스며듭니다.


책임 없는 친밀감은 가볍고 산뜻하지만,

폭풍우가 몰아칠 때, 당신을 지켜줄 지붕이 되어주지는 못합니다.


썸이라는 얕은 물가에서 노니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용기를 내어 깊은 물속으로 다이빙해 보기를 권합니다.


그 깊은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누군가의 체온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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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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