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이 끝난 사람들

가스라이팅(2)

by 한가을

판결이 끝난 사람들(가스라이팅1)


한가을

어느 월요일 아침


전산망 화면에 숫자 하나가 떴다

경찰 입건 사실 (2). 은하수 였다.


사건명은 특수폭행

피해자는 역시나 그녀의 남편 김 씨였다. 며칠 전 첫 면담에서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돌아오는 데는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곧장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길게 이어졌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불통은 곧 불안으로 번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응답한 것은 은하수 씨가 아닌 남편 김 씨였다.


“아, 주무관님...

지금 은하수가 많이 울어서 전화를 못 받네요.

어젯밤에 일이 좀... 있었습니다...”


차분하다 못해 정중하기까지 한 그의 목소리가 오히려 소름 끼쳤다. 나는 그 길로 서류를 챙겨 그들의 아파트로 향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발랄한 발소리가 먼저 들렸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짖으며 달려 나온 것은 그들이 키우는 검은 강아지였다. 뒤이어 남편 김 씨가 정중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집 안은 정갈했다. 우려했던 술 냄새도, 소란의 흔적도 없었다. 지독한 정적이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거실 소파 중간에 은하수 씨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주무관님... 저 이제 감옥 가나요?

오빠가 또 신고했어요. 무서워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어제 새벽, 편의점 앞에서 다른 여자와 같이 있는 남편을 본 것이 화근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분노를 참지 못한 그녀가 휴대폰을 쥔 손을 휘둘렀다. 그것이 남편의 머리를 살짝 스친 찰나, 남편은 망설임 없이 112를 눌렀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남편 김 씨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화단 벤치에 그와 나란히 앉았다. 가까이서 본 그의 체격은 무척 단단했다. 나는 그를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남편분 체격을 보니,

은하수 씨에게 일방적으로 맞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그 사람,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까지 가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경찰에 신고하는 겁니다...

저를 말려줄 사람이 경찰뿐이니까요.”


그의 말은 이성적인 듯했으나 기괴했다.

상대를 멈추기 위해 공권력을 이용한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언제든 상대를 파괴할 힘을 쥐고 있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오늘 피해자 조사를 받고 오셨다고요?

경찰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이번에는 피해자 접근 금지 신청을 하게 될 거라고 하더라구요.”


나는 다시 물었다.


“지난번 스토킹 사건 때는 피해자 접근 금지를

왜 신청하지 않았나요?”


“주무관님...

저사람 술만 안 먹으면 정말 착한 여자거든요.

결혼해서 안정되면 나아질 거라 믿었습니다.

부부니까 같이 살면서 고쳐나가야지...

떨어져 지내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죠.”


그의 목소리는 관대했다.

하지만 그 다정한 말들이 자꾸만 내 마음을 찔렀다. "술만 안 먹으면 착하다"는 말은, 은하수 씨가 왜 술에 매달리는지에 대한 자신의 책임은 지운 채 그녀를 고쳐야 할 대상으로만 몰아넣는 낙인 같았다.


“은하수 씨의 범죄 기록 대부분이 남편분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접근 금지를 하지 않는 게 정말 그녀를 위하는 일이 맞을까요?”


내 질문에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속내를 감춘 채 짧게 답했다.

그의 침착한 표정 너머로 아내를 향한 애정은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먹잇감이 덫에 완전히 걸려들 때까지 기다리는 사냥꾼의 인내심이 보였다.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법적으로 은하수 씨는 엄연한 스토킹 가해자이자 특수폭행 피의자다. 어떤 이유로도 타인의 일상을 망가뜨린 범죄를 미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실체는 판결문 속 글자와는 전혀 달랐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은 나의 임무다.

그런데 내 앞의 피해자는 정말 보호받아야 할 사람일까. 아니면 피해자의 가면을 쓴 채 상대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또 다른 가해자일까.


가해자로 분류된 사람에게서 희생양의 그림자를 보고, 피해자로 불리는 사람에게서 포식자의 눈빛을 읽어야 하는 이 괴리감이 나를 답답하게 눌러왔다.


'어떻게 해야 이 지독한 굴레를 끊을 수 있을까.'


나는 범죄자 은하수가 아닌, 인간 은하수를 이 지옥에서 꺼낼 현실적인 방법을 고민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 곁의 불편한 이웃들에 대한 낯선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례는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철저히 재구성하였습니다.


#법무부 #보호관찰 #공무원 #보호직 #공안직 #범죄심리 #범죄예방 #사회복귀 #무너진심리 #불편한이웃 #많관부

월, 일 연재
이전 11화판결이 끝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