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이 끝난 사람들

가스라이팅(3)

by 한가을

나는 보호관찰관입니다.

판결이 끝난 사람들(가스라이팅1)

판결이 끝난 사람들(가스라이팅2)


결국 나는 결단을 내렸다.


법원에 특별준수사항 추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피해자에 대한 접근금지와 주거지 분리,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연락하지 말 것을 골자로 했다. 법원은 사안의 시급성을 인정했는지 며칠 만에 바로 인용했다.


결정문이 그녀의 집으로 배달되었을 무렵, 나는 은하수 씨에게 보호관찰소 출석을 명령했다.


면담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푸석하게 내려앉았고, 며칠 사이 더 수척해진 몸은 위태로워 보였다. 그 뒤에는 딸의 옷깃을 떨리는 손으로 꼭 붙잡은 아버지가 함께였다.



나는 법원에서 인용된 특별준수사항을 고지했다.


“오늘부터 피해자의 주거지 및 직장 100미터 이내 접근하시면 안됩니다. 오늘 이후로 함께 지내던 집에서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남편의 전화, 문자, SNS 등 어떠한 방법으로도 연락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위반하면 집행유예 취소 등 불이익 조치 받을 수 있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발악하듯 말을 쏟아냈다. 분노라기보다 소중한 것을 빼앗긴 아이 같은 투정에 가까웠다.


“아니, 주무관님! 저희는 부부라고요!

어떻게 헤어지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세요?

이혼하라는 거예요? 너무하시잖아요!

문자도 안 된다니, 이게 말이 돼요?

너무해요, 진짜...”


그녀에게 그 남자는 가해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전부를 바친 유일한 우주였다. 사랑이라는 착각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나는 서류를 밀어두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은하수 씨, 이 서류들을 한번 보세요.

여기 적힌 수많은 범죄 전력들, 은하수 씨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남긴 기록이에요. 만약 두 사람이 지금처럼 계속 같이 지낸다면, 이 기록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 같나요?”


그녀는 입술을 뜯으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은하수 씨가 내 입장이라면, 매일 경찰서에 불려 다니고 온몸이 멍든 채로 울고 있는 사람을 그냥 그 집에 살게 둘 수 있겠어요? 은하수 씨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마침내 숨겨왔던 진심을 털어놓았다.


“사실... 저도 알고 있었어요.

남편이 자기가 저 때문에 범죄자가 된 걸 그대로 저한테 돌려주고 싶어 한다는 거요. 저를 똑같이 범죄자로 만들어서 복수하고 싶어 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예상치 못한 고백에 면담실 안의 공기가 멈춘 듯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누르며 차분하게 물었다.


“그 사실을 언제 처음 알게 되었나요?”


“예전에 가정폭력 신고로 경찰에서 가족상담을 연결해 준 적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상담받는 중에 들었어요. 남편이 상담 선생님한테 대놓고 말하더라고요. 자기가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줄 거라고...”


남편은 이미 타인에게 자신의 복수심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을 들으면서도 지옥 같은 일상으로 돌아간 그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다시 나직이 물었다.


“남편의 의도를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그 곁을 떠나지 못했나요?”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는 오빠가 없으면 안 돼요."



깊게, 아주 깊게

잠식된 그녀의 영혼이 보였다.


자신의 파멸을 설계한 사람을 구원자로 믿고 있는 지독한 종속이었다. 옆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비극은 때로 이토록 정중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찾아와 사람을 망가뜨린다.


결국 그날 이후 그녀는 강제로 짐을 싸서 아버지 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녀가 나간 뒤에도 나는 한동안 면담실을 떠나지 못했다. 가해자로 분류된 서류 뭉치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인간의 실체를 마주하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깎여 나가는 기분이 든다. 나는 기록지 끝에 평소보다 더 정성 들여 적었다.


[거주지 분리, 피해자 접근 금지 특별준수사항 고지함. 대상자는 피해자의 의도를 인지하고 있으나 심리적 종속 상태가 심각함. 보호자와의 연계 및 밀착 감독을 통해 격리 상태 유지 필요]


타인의 삶에 개입해 관계를 끊어내는 일은 끝내 쉽지 않다. 원망을 감수하며 내린 결정이 과연 최선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보호관찰관이다.

연민보다 재범 방지라는 책무가 더 무겁다.

누군가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고리를 끊어야만 한다.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서류들은 여전히 쌓여 있다.

은하수 씨가 이제는 술병 대신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지옥에서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곁의 불편한 이웃들에 대한 낯선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례는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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