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잃어버린 나를 불러낸 말 : 실패 속에서 다시 찾은 나
“김대리, 미안한데 커피 한 잔만 부탁해.”
전무님의 호출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중소기업에서
여직원이 커피를 타는 풍경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MZ세대들처럼
“그건 제 업무가 아닌데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현실 속의 나는 “네, 알겠습니다” 하고 곧장 탕비실로 향했다.
분명 나보다 직급이 낮은 남자 사원이 있었지만,
전무님의 시선은 항상 나를 향했다.
이럴 때마다 답답함은 목울대를 타고 올라왔고,
인정 욕구는 한 발짝 더 멀어졌다.
퇴근 후,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커피 타는 내가 싫은 게 아니고… 아직도 이런 걸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이 싫은 거야. 그래서 더 지쳐.”
남편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말했다.
“요즘 부쩍 힘 빠져 보인다.
예전처럼 열정이 있던 때를 떠올려 봐.
그때처럼 다시 계획을 세워보는 거 어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과거의 한 시절이 떠올랐다.
내 안에 불씨처럼 남아 있던 ‘인정 욕구’가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편의점 알바?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해보면 좋겠는데…”
대학 전공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1학년 2학기에 자퇴한 뒤,
나는 부모님 눈에 대역죄인이나 다름없었다.
‘돈이라도 벌자.'라는 마음에 알바 자리를 알아보던 중,
엄마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한 알바가 뭐가 있지..?’
그러다 우연히 내 눈을 사로잡은 한 줄의 구인 공고.
[ㅇㅇㅇ 세무사 사무실 / 단기 알바 구합니다 (3개월)]
순간, 심장이 두 번 뛰었다.
이거다!
세무사 사무실에서의 업무는 생소한 회계 용어 속에서 시작됐다.
서류를 정리하고, 의뢰 기업의 자료를 챙기며 하루하루를 채웠다.
대학 실패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3개월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해 보자’라고 다짐했다.
그 진심이 전해졌던 걸까.
단기 계약이 끝날 무렵, 사무장님께서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혹시 정규직으로 전환할 생각 있어요?”
그 순간,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기회는 이렇게도 오는구나.
정규직이 된 나는 더 열심히 일했고, 마침내 회계 언어가
조금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본기가 부족한 한계는 뚜렷했다.
퇴근길 버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더 배우고 싶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안전한 자리보다, 부족함을 채우는 길을 가기로.
1년 6개월의 경력을 뒤로하고, 23살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강의실 창가 자리에 앉아, 나는 필기노트를 빽빽하게 채웠다.
강의를 마치고 집에 와서도 굳이 시험기간이 아니었음에도
책을 덮지 않았다.
마침내 2학년 1학기, 석차 1등!
그날, 성적 결과를 확인한 마우스의 손끝은 떨림으로 가득했다.
창밖에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마치 나를 위한 단독 콘서트 같았고,
멀리 종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순간 세무사 사무실의 나를 떠올리며 속으로 말했다.
‘이제 나, 다시 인정받을 수 있겠구나.’
남편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그 시절을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진심 어린 조언이, 잊고 있던 불씨를 다시 살릴 때가 있다.
잃어버린 열정은 이렇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