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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기억 삭제 버튼이 있다면

기억을 지우면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다(feat. 영화 '이터널 선샤인')

by 비타


지금까지 만난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저는 <이터널 선샤인, 2005> 이라고 말하고 싶은데요.

이미 많은 분이 이 영화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 팬 중 한 명이랍니다. :)



출처 : 노바미디어(주) 이하 동일.



미셸 공드리 감독이 연출하고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을 맡아 열연하였는데요.

내용, 연기, 시나리오 할 것 없이 훌륭한 앙상블!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특히 공드리 감독의 뛰어난 감각적인 연출이 압권입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이미지를 그대로 시각화해서 보여주거든요.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어떻게 저런 기발한 생각을 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수작업(?!)으로 공을 들여 다소 예스럽고 엉성하게 설정했는데 이것이 감독 특유의 연출 기법이라고 하네요.

세련되고 깔끔한 정제된 기억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얼기설기 보여줍니다.

이 때문에 더욱 신비하고 기괴한, 영화의 판타지적인 요소가 더욱 현실감 있게 느껴집니다.





조엘(짐 캐리 분)은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을 운명처럼 만납니다.

서로의 성격, 성향, 취미 등은 정반대였어요. 요즘으로 치면 MBTI에서 완전히 극강의 반대 성향이라 할 수 있지요.

처음에는 내게 없는 것을 가진 상대방에게서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잖아요?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어요.

활발하고 외향적인, 톡톡 튀며 즉흥적인 클레멘타인과는 달리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심사숙고형인 조엘.

반대되는 서로의 모습에서 강한 끌림을 느끼고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급격하게 발전하게 됩니다.





달콤한 기억들로 영원히 세상을 채울 것만 같던 시간이 흐르고, 서로에게 너무도 익숙해진 그들은 헤어져 나올 수 없는 권태에 이르게 되는데요.

서로의 반대되는 성향을 좋아했던 그들은 바로 그 반대되는 점 때문에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험한 말과 행동으로 N극과 S극처럼 밀어내더니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이별을 선택하게 되죠.

사랑 끝에 남은 것은 끝없는 공허와 미움, 쓸쓸함, 그리움… 우울한 감정과 의미 없는 하루를 소비하는 어두운 날들이 이어집니다.





조엘은 이 관계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 클레멘타인을 찾아갔지만, 자신을 처음 보는 듯한 그녀의 냉소적인 반응에 얼어붙고 마는데요.

알고 보니 클레멘타인은 나쁜 기억을 삭제하는 시술을 받아 조엘과 함께했던 모든 기억을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조엘은 화를 참지 못하고 복수하듯 즉각 같은 시술을 받게 되어요.





그런데 그는 '기억'을 지우면서 끝없이 생성되는 '기억'을 만납니다.

선택적으로 기억을 삭제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연인과 함께했던 시간, 추억, 장소, 대화… 추억들이 폭탄 터지듯이 하얗게 사라지는데요.

최근 기억부터 없어지는데, 서로 싸운 기억밖에 없기에 차라리 사라지는 것이 통쾌하고 유쾌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애틋했던 기억들이 떠올라요. 조엘은 건물이 무너져 내리듯 스러지는 기억 속에서 안간힘을 내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연인의 트라우마를 듣는 바로 그 순간, 조엘은 이 기억만큼은 반드시 붙들고 싶다고 생각하지요.

의식적으로 곧 없어질 기억 중 '삭제되기로 계획되지 않은', 더 깊은 곳의 기억을 찾아 연인과 함께 이리저리 도망칩니다.

그러면서 기억은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내지요. 없던 기억에서 있는 기억으로, 바로 놓치고 싶지 않은 그녀와 함께 말입니다.








| 선택적 기억삭제가 현실에서 가능한가?



영화처럼 실제로 지우고 싶은 것만 쏙 골라서 없앨 수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처럼 힘든 기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구해줄 '신이 내린 기술'이 되지 않을까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계속된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는 질환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침



명상이나 마음 챙김, 심리적 치료 등이 있지만 영화처럼 기계를 뇌에 장착하여 프로그램 된 억을 직접적으로 삭제하는 기술은 없습니다.

21년 11월 카이스트(KAIST,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뇌에서 안 좋은 기억을 삭제할 수 있다'는 연구를 발표했는데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료 : current biology, KAIST 생명과학과 한진희 교수팀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경험'은 '기억'이라는 형태로 뇌에 저장, 회상되며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유지되는데, 같은 학습 반복으로 형성된 기억은 같은 신경세포(neuron) 집단을 통해 계속 저장 및 강화된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이전 경험했던 학습을 다시 하면 기존 기억 뉴런에서 시냅스 연결이 감소하는 반면 새로 참여하는 뉴런에서는 시냅스 연결이 증가함을 밝혔습니다.

따라서 반복 및 학습된 공포 기억이 두 번째 학습 때 활성화된 편도체 뉴런들에 새로 저장된다는 것, 즉 같은 경험이 처음과 다른 새로운 집단에 저장된다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연구 내용>
생쥐의 뇌 *편도체 영역에서 기억저장 세포를 표지하고 **광유전학 기법으로 조절하는 기술을 이용
첫 학습 하루 후 같은 학습을 반복했을 때 같은 기억이 전혀 다른 세포들을 통해 다시 저장되고 회상되는 현상을 발견함


* 편도체(amygdala) : 사람의 감정을 읽거나 공감하는 등 정서를 담당하는 기관
** 광유전학(Optogenetics) : 빛과 유전학을 접목한 기술. 빛을 이용하여 빛에 반응하는 특정 단백질의 기능을 원격 조절함으로써 생체 내의 기능을 제어하는 기술






한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는 기억은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뇌에서 그 기억을 저장하는 세포들은 활발히 교체된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며 "앞으로 기억 뉴런을 표적으로 해서 원하지 않는 기억 삭제 및 퇴행성 뇌 질환에서의 기억상실 억제, 복원을 가능하게 하는 미래 기억제어 기술 개발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출처 : Pixabay






영화는 질문합니다.

사랑은 고통이니 끊어내고 편히 살 것인지, 아니면 그런데도 계속 사랑하며 살 것인지.

결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당신 삶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매체 속에서 건강 정보를 찾다

글 I 비타V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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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

1. Hye-Yeon Cho, Wangyong Shin, Han-Sol Lee, ..., Boin Suh, Eunjoon Kim, Jin-Hee Han.(2021), Turnover of fear engram cells by repeated experience. Current Biology 31, 5450-5461.

2. 서울대학교 의학정보

3. 카이스트 기억생물학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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