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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삶의 심리학 mind May 06. 2020

어떤 죄책감에 대한 변호

임민경 범죄피해자지원센터

대중의 인식 수준이 변화함에 따라 가해자 관점에서 성범죄를 기술하는 태도는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성범죄 피해 후 죄책감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이 존재합니다. 피해자의 죄책감을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미투 운동 이후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과 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가장 반갑게 받아들이는 변화 중 하나는, 피해자에게 쏟아지던 촘촘한 검증의 시선을 거두어야 하며, 그런 검증은 가해자에게 해야 한다는 논의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흔히 성범죄가 발생했을 때는 피해자의 평소 행실이나 당일에 입었던 옷 등을 거론하면서 피해자가 정말 ‘정당한 피해자’가 맞는지 부당하게 검열하곤 하는데,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그러한 시도는 피해자의 회복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가해자와 공모하여 그를 비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피해자에게 네가 조심했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멈췄어야 한다고 해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이 전보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고, 사건 이후 피해자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부정적 감정 -특히 죄책감-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많은 이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성범죄 후 죄책감에 시달리는 피해자들 역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쁜 것은 가해자이며, 나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이 당연한 명제와 실제 감정 사이에 간극은, 평소 성인지 감수성이 뛰어났던 사람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간극입니다.

테세우스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자책하고 있는 아리아드네의 모습.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피해자에게 죄책감을 강요하는 자책문화는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뿌리 깊은 강간통념 


기실 죄책감과 후회는 성범죄의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가장 흔한 느낌 중 하나이며, 피해자의 회복을 이야기할 때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게 되는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범죄 피해자들이, 특히 성범죄 피해자들이 흔히 경험하는 죄책감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개인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피해자들 역시 강간통념(rape myths)이 아직 유통되고 있는 사회 속에서 나고 자랐으며, 피해자조차 이러한 관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강간통념이란 강간 범죄와 그 피해자 및 가해자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향되고 고정관념적인 신념이나 태도를 말하며(이석재, 1999), 성범죄를 부정하고 정당화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강간 피해자는 평소 성관계가 난잡하거나 평판도 좋지 않다", "여자가 키스나 애무를 허용하는 것은 성관계를 허용한다는 뜻이다", "여자들이 조심하면 성폭력은 줄일 수 있다"와 같은 문항에 강하게 동의하면 동의할수록 강간통념을 강하게 갖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성범죄 가해자의 경우 높은 수준의 강간통념을 보이며, 강간통념은 및 차별적 성역할 태도는 공격적인 성행동을 예측합니다(최인숙 & 김정인, 2005; Bohner et al., 2005).


(물론 성차가 있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피해자가 되기 쉬운 여성들 역시 강간통념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친밀한 타인들을 통해 형성된 성적 가치관은 잘 변하지 않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체화되게 되지요. 스스로 예상하지 못했던 피해를 겪었다고 해서 이러한 고정관념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며, 피해자는 ‘내가 좀 더 조심했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여지를 준 것은 아닌지’와 같이 자신을 의심하게 되어버립니다.


고약한, 죄책감


피해자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어떠한 부정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무언가 달라졌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피해자에게는 아주 약간이지만 통제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요인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하거나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 ‘~하지 말 걸’ 하고 생각하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상향적 사후 가정사고라고 합니다. 보통 상향적 사후 가정사고는 후회나 실망 등 부정적 감정을 수반하지만,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 주는 긍정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Roese, 1994).


특히 어린 연령에 반복적 피해를 당했을 경우, 그리고 가해자가 자신이 의지해야만 하는 친밀한 타인일 경우, 피해자는 더욱더 자신을 탓하는 경향을 보이기 쉬워집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상황보다는, 자신의 행동이 바뀜으로 해서 아주 조금이라도 결과에 변화가 생기는 편이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상황이니까요.


트라우마 연구자이자 치료자인 주디스 허먼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악한 이가 나라면, 부모는 선하다. 악한 것이 나라면, 선해지기 위해서 나만 노력하면 된다. 이 운명을 이끈 것이 나라면, 어떻든 간에 이것을 변화시킬 힘은 내게 있다.” <인 트리트먼트>라는 상담 드라마에서, 상담자는 내담자인 소피에게 이러한 설명을 해줍니다.


상담자: 어쨌든, 신약 성서에서 신은 언제나 선한 역할이고, 부도덕하고 악한 것은 인간의 몫이지. (...) 왜 그런지 알 수 있겠니?
소피: 글쎄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지같이 느끼기를 좋아해서 그런가요?
상담자: 그래, 바로 그거란다. 우리는 신이 선하고 인간이 악한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지, 신이 악한 세상보다는 말야. 그래서 사악한 권위나 불공정한 정부나... 무관심한 부모들, 이런 건 꽤나 무서운 개념이야. 이런 건 우리 인생을... 무섭고, 의미 없어 보이게 만드니까. 그리고 바로 이게 아이들이 자기를 탓하는 이유란다. 부모를 탓하지 않고 말이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피해자들은 몹시 긴박했던 상황에서 자신이 당황하고, 놀라고, 겁을 먹어 하거나 하지 못했던 어떤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기도 하며, 심지어는 ‘나 때문에 그 사람이 가해자가 된 것 같다’며 가해자를 걱정하고 미안해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반응은 가해자와 친밀했던 피해자에게서 더 흔하게 나타납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어떠한 이유 때문이든 간에 피해자가 스스로를 책망하고,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질 겁니다. 그리고 동료 시민으로서 조금 더 공감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해 주고 싶어 질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때 그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며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 안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특히 극도의 공포를 경험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긴장성 부동’과 같은 현상은 죄책감과 귀책의 문제를 더욱 까다롭게 만들기도 하고, 피해자가 사건을 마음속에서 정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감정도 자유롭게 느낄 수 있도록


화가 나는 일입니다만, 성범죄 사건에 있어 가해자와 그의 변호인들은 자신들에게는 익숙한 논리인 강간통념에 따라 자신의 무죄나 감형을 주장합니다. 이를 지켜보는 피해자와 주변인들은 분개하고, 그들의 논리(?)인 강간통념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은 마음과, 만약 이 과정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피해자가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전해주고 싶은 마음도 함께 생겨납니다. 그런 말 한마디에 힘을 얻을 수 있었던 피해자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거나 이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피해자의 죄책감을 최대한 빨리 교정해 주고 싶은 욕구를 느끼겠지만, 그리고 그 행동은 분명 선의로서 하는 언행이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해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 중 하나는 이러한 문구입니다.


사건 이후에 피해자가 어떤 것을 느끼든, 그것은 “비정상적인 사건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다”.

피해자의 회복에 있어 왕도는 없으며, 반드시 이러한 방법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또 이전 글에서 적었듯, 피해자의 느낌과 행동은 각기 다를 수 있으며, 어떤 것은 피해자답고 어떤 것은 아니라고 결정된 것도 없습니다. 어쩌면 피해자 곁의 사람들이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위로는, 그가 어떤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든 간에 그것을 수용하고 담아주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mind


   <참고 문헌>  

이석재 (1999). 강간통념 척도의 개발과 타당도 검증. 한국심리학회지: 사회 및 성격, 13, 131-148.

최인숙, & 김정인. (2015). 성폭력 통념수용, 대인폭력수용 및 성역할-관련 태도가 공격적 성행동에 미치는 영향: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국심리학회지: 여성, 20(3), 277-300.

Bohner, G., Jarvis, C. I., Eyssel, F., & Siebler, F. (2005). The causal impact of rape myth acceptance on men's rape proclivity: Comparing sexually coercive and noncoercive men. European Journal of Social Psychology, 35(6), 819-828.

Roese, N. J. (1994). The functional basis of counterfactual thinking.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66, 805-815.


임민경 범죄피해자지원센터 | 임상심리 전문가

독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하였고, 현재는 임상심리전문가로서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언제나 누군가의 애독자이자 무언가의 애호가이며, 트위터 그만두어야 한다고 매일 말하지만 그만두지 못하는 트위터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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