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규 마인드워크 대표
사별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시간 속에 남겨진 사람들을 던져 놓는다. 아침에 눈떠 새로운 하루를 맞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Double' 전이 떠올랐다.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그리고 기억과 애도에 대하여.
"선생님, 시간이 너무너무 무거워요"
아들을 자살로 잃은 어머니가 말한다. 그녀의 시간은 저절로 흐르지 않는다. 무거운 시계침에 몸을 묶고 끌고 가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한다. 굴러 떨어지고 바위를 밀어 올리는 영겁의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Sisyphus)처럼 그녀에게 시간은 그 자체로 끔찍한 형벌이 되었다.
어떤 집에든 평범하게 어울릴 법한 백색 원형 벽시계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두 개의 시계는 정확히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Untitled, Perfect Lovers>.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 1957-1996)의 작품이다. 완벽하게 똑같은 모양과 정확하게 똑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개의 시계는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모르는 그야말로 완벽한 연인처럼 보인다.
쿠바 출생으로 동성애자였으며, 에이즈 환자로 당시 완전한 사회적 소수자였던 작가는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작가로 선정될 정도로 미국 뉴욕을 대표하는 현대미술의 대표 아이콘이 되었다. 전선으로 이어진 전구, 한 쌍의 거울, 한 쌍의 벽시계, 한 쌍의 커튼, 바닥에 쏟아놓은 사탕들, 반짝이 구슬 장식 등 작가가 선택하는 소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물건들이다. 일상의 물건으로 간소하고 단출한 형식으로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만남과 이별, 파괴와 재생, 채움과 비움에 대한 작가의 사유이다.
곤잘레스-토레즈 작업을 관통하고 있는 이러한 주제는 그와 8년의 시간을 함께한 연인 로스 레이콕(Ross Laycock, 1959-1991)과의 사랑과 죽음, 이별과 관련되어 있다. 에이즈 공포가 미국 문화 예술계를 휩쓸던 시절 연인 로스 역시 에이즈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3년 만에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연인의 고통스러운 투병 과정과 죽음을 지켜봤던 작가는 연인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비통함과 애도를 작품에 녹아 내었다.
대표작 중의 하나인 원형의 두 벽시계로 이뤄진 <무제, 완벽한 연인들>(Untitled, Perfect Lovers, 1990)은 부제의 ‘완벽한 연인’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똑같이 맞춰진 시각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어긋나다 결국 각각 다른 시간에 멈추도록 했다. 이 쌍둥이 시계는 동일한 분초로 움직이고 있지만 어느 쪽인 먼저 멈출지 알 수 없다. 분신 같았던 연인도 각기 다른 시각에 죽음을 맞이 할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자명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자신과 다른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로스 상황에 대한 은유 일 것이다.
곤잘레스 토레즈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1991)은 연인 로스가 건강했던 시절 체중이었던 79kg 무게의 사탕 더미를 쌓은 작품이었고, <Untitled, Rossmore II>(1991)는 로스가 사망하기 직전의 몸무게인 34kg의 직사각형 사탕 잔디를 구성한 작품이었다. 관객은 자유롭게 사탕을 가져가 먹을 수 있는데 로스 몸의 일부로 표현되었던 사탕이 관객의 몸의 일부로 들어가 기억되도록 하는 이러한 방식은 연인에 대한 공적 애도의 표현이다. 사라진 사탕만큼의 무게는 매번 새롭게 채워지며 회복된다. 채워진 사탕은 어제의 그 사탕이 아니지만 변치 않는 것은 그의 존재의 시작과 끝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작가의 사랑이다.
사별(bereavement)은 죽음으로 누군가를 떠나보낸 객관적인 상황을 말하며 비탄(grief)은 그 사별에 대한 남겨진 사람의 정서적, 인지적 행동적 반응이다. 애도(mourning)는 보통 사별이나 애도와 혼용되기도 하나 grief를 공적으로 드러내고 자신의 삶으로 사별의 비통함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말한다. 연인을 향해 있는 곤잘레스 토레즈의 작품들은 바로 이 애도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사별로 크나큰 상실의 충격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잃은 것’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나머지 그가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가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들의 시계는 이제 멈췄다. 어머니의 시계도 아들이 떠난 그때 함께 멈췄다. 그녀의 시계를 돌리기엔 아직 시간이 끔찍하다.
그러나 언젠가 마지막뿐 아니라 아들의 처음도 생각할 수 있기를, 짧은 아들의 삶이 그녀에게 주었던 기쁨도 떠올릴 수 있기를. 그렇게 함께했던 둘만의 특정 ‘시간’을 떠올릴 수 있기를,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지금은 상담실에서 그녀의 무거운 시간을 함께 밀어내고 있다. mind
고선규 마인드워크 대표 | 임상심리 Ph.D.
임상심리전문가그룹 마인드웍스 대표이자 고려대 KU마음건강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중인 임상심리학자이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과 애도가 관심 분야이며 자살 사별자에 대한 전문적인 치료와 상담을 하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탐미하며 그 속에서 심리학적 이야기를 관찰하고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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