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연 분당서울대병원 인권센터
우리는 일상적으로 크고 작은 일들을 실패한다. 그런데 실패할 때마다 좌절하는 건 사실 너무 힘든 일이다. 어떤 실패는 좌절하지 말고 그냥 좀 넘어가면 좋겠는데... 필요한 것은 내가 해온 것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끈기가 없다던 그의 고백은...
그는 자기가 끈기 없고 의지가 약해서 뭘 시작하면 안 된다고 했다.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은데 다른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좋아하는 게 생겨도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십 년 가까이 한 직장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열심히 버텨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친구와 맥주를 마시는 자리였다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먹던 거라 먹으라 하면 딱 적당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상담자였다. 물끄러미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이 끈기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는 거네요. 하다가 끈기 없이 중단한 일들이 있었던 거예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얘기해 보시겠어요?”
어떤 만화 캐릭터를 좋아해서 굿즈를 잔뜩 사들이다가 싫증이 나서 그만뒀고, 악기를 배우다가 몇 개월 만에 시들해져서 레슨을 관뒀다고 했다. 아… 나로 말하자면 마침 얼마 전 어떤 재즈 앨범에 꽂혀서 한 보름간 아예 연주자의 패밀리를 파다가 플레이리스트에서 삭제해버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이었고, 어떤 운동을 시작하면 대체로 2~3개월 하다가 그만두면서 ‘내가 의지가 약한 게 아니라 의지가 바뀐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기에, 역시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면 이렇게 얘기했을 거다. “뭐래? 그럼 무슨 캐릭터 하나를 영원히 좋아해야 하냐? 다 노느라 하는 건데 하다 재미없어지면 바꾸는 거지. 애들도 새 장난감 사주면 한참 끼고 살다가 내려놓고 딴 거 갖고 놀더라.” 그러나 나는 역시 그의 상담자였다. 자신의 빠른 포기와 싫증 사례를 우물쭈물 고백하면서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그에게, 눈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을 하며 입으로는 다시 질문을 했다.
"재미있는 것을 찾아서 취미 생활을 하다 보면 흥미가 곧 줄어들 수도 있고, 그건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끈기, 의지 같은 말을 취미 생활이나 재미있는 활동에 쓰지는 않아요. 뭔가 하다가 끈기가 없었거나 쉽게 싫증 나서 그만둔 적이 또 있었어요?” 이번엔 부모님의 권유로 어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다 금방 그만둔 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건 그가 원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고, 게다가 당시에는 이미 안정적인 생업이 보장되어 있었다.
끈기를 발휘할 기회
그랬다. 그는 놀랍게도 아직 한 번도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서 그 일에 몰두하거나 노력해본 적이 없었고, 시작을 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중도 포기하거나 실패한 적도 없었다. 열정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지만, 그 열정은 늘 단순한 취미 생활로 향할 수밖에 없었을 뿐, 끈기 있게 달려들어야 할 일은 늘 부모님이 정해주었다. 스스로 하고픈 뭔가를 정해서 시작을 해봤어야, 해볼 마음을 먹어 봤어야, 의지고 끈기고 간에 발휘를 하던가 말던가 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엉뚱하게도 오랫동안 자신이 의지박약에 쉽게 싫증을 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가족의 요구에 맞춰 열심히 사느라 아직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나 끈기와 열정을 발휘할 대상을 찾을 기회가 없었던 것인데…
상담이 더 이어지면서 그가 부모님에 의해 설계된 삶을 사는 와중에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자신만의 성취를 이루어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학 4학년 졸업반 때에는 (전공은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지만) 어차피 취직할 것이니 기왕이면 좋은 직장으로 가고 싶은 욕심에 열심히 공부한 끝에 학과에서 1등을 해서(4학년 때 1등이라니!) 장학금을 받았다고 했고, 부모님의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자라온 환경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취업하는 데에 성공했고, 그 새로운 세상의 온갖 낯선 것들 가운데에서 무려 10년 가까이 도망가지 않고 버텨왔다. 이것들은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노력한 결과였고, 끈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그는 그걸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남들 다 하는 건데 뭐가 잘한 거냐고 반문했다.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왜 여태 자신이 해온 것들을 인정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겸연쩍은 듯 눈맞춤을 피했고 침묵이 이어졌다.
그릿, 끈기와 열정
몇 년 전 TED 강연에서, 펜실베니아 대학 심리학과의 안젤라 덕워스 교수는 그 특유의 청량한 목소리로 마치 랩을 하듯 리드미컬하게 성공을 위한 열쇠, 그릿에 대해 강연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릿은 모래, 작은 돌, 연마제라는 뜻과 함께 투지나 기개라는 뜻이 있다. 'Grit the teeth’라고 하면 '이를 악물다’라는 뜻이라니, 아주 있는 힘껏 버틸 때 쓰는 말이겠다. 안젤라 덕워스는 성취를 위한 열정과 끈기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그릿을 소개하며, 그릿이 성공과 성취에 있어서 지능이나 재능보다도 중요하다고 했다. 타고난 재능이나 지능이 아니라, 끈기나 열정 같은 것들이 문제라면 이제부터라도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용기와 동기를 심어주는 덕이었을까, 그녀의 강연이나 책은 대중적으로도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특히 'Grit: the power of passion and perseverance’라는 책은 출간 후 아마존, 뉴욕타임스, 포브스에서 약 25주간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유지했고,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2016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국내에서도 2016년 하반기에 ‘그릿’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단 2개월 만에 10만 부가 판매되었다.
그리고, 좌절에 대한 내성
그릿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고 아이들에게 그릿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던 안젤라 덕워스의 연구팀은 최근 한 연구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예측하는 주요 변수로 그릿 외에 또 다른 요인을 연구했다. 그 요인은 ‘좌절에 대한 내성’이다. 덕워스 연구팀은 고등학생 391명에게 어떤 과제를 주고 수행에 실패하거나 잘하지 못할 때 느끼는 좌절감을 측정했다.
그리고 과제가 잘 풀리지 않아도 쉽사리 좌절하지 않는 성질을 좌절 내성이라고 불렀다. 연구에 참여한 고등학생들의 좌절 내성과 학교 성적과의 관계를 분석해보니, 좌절 내성은 그들의 지능, 자기 통제력, 그릿 등과 별개로, 학교 성적과 상당히 높은 연관성이 있었다. 연구팀은 그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의 졸업 후 대학생활까지 추적하여, 좌절 내성이 높았던 학생들은 이후 대학 생활에서의 성적도 좋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웬만하면 잘 좌절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당시뿐 아니라 나중에도 원하는 성취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좌절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좌절한다. 책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면 좌절감을 느끼고, 연인과 대화를 하다가 말다툼으로 번져 상대와 갈등이 생기면 좌절감을 느낀다. 다이어트 5일 차인데 야식을 참지 못했을 때 좌절하고, 이번에는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시험을 잘 못 봤을 때 좌절한다. 그런데 실패할 때마다 사사건건 좌절하는 건 사실 너무 힘든 일이다. 어떤 실패는 좌절하지 말고 그냥 좀 넘어가면 좋겠는데, 한 번 실패했다고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려면 여태 내가 한 것들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이 이제까지 한 것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다음 걸음을 뗄 수가 없다. 자신을 인정하고, 내가 한 것들을 인정하기. 그래야, 지금 하는 게 잘 안되더라도, 힘들게 한 결과가 고작 이건가 싶어서 마음이 괴롭더라도, 여태 이만큼 해온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고 괜찮다고 자부하며, 자신을 믿고 다시 일어나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취를 등한시하고, 실수나 실패에만 집중하며 심지어 가중치를 붙여 평가한다. 놀라울 정도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저기 저 먼 곳이기에 고작 여기까지 왔다는 걸 인정받으면 오히려 부끄럽고 면구스럽다. 남들 다 하는 걸 칭찬받는 것 같은 때에는 심지어 나를 우습게 여기나 싶어서 은근히 무시당한 듯 기분이 나쁘다. 그러나 남들 다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다 다르게 태어나 각자 다른 환경에서 자기만의 인생을 살고 자기만의 역사를 만든다.
그렇다면 성취도 각자의 맥락에서 봐야 할 텐데, 자신의 성취를 인정할 때 매우 단순한 잣대를 가지고 남들과 비교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다. 비교 평가를 하려면 차라리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몸무게를 재면서 자를 갖다 대면 안 되겠고, 지난달부터 공부한 사람이 작년부터 공부한 사람과 성적을 단순히 비교해서도 안 되겠다. 나의 동기에서 비롯된 열정과 끈기로 비로소 내가 이루어온 것들을 바로 보고, 그 수고와 결실을 인정해 주기. 그래야 그다음이 있다.
안젤라 덕워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늘 자신을 두고 천재는 아니라며 현실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천재들과 비교 평가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아이였다면 늘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이 참 혹독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늘 천재 검증에 시달리며 자라서는, 엉뚱하게도(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지능과 재능보다는 노력과 열정이 더 중요한 성공의 열쇠라는 것을 연구한 끝에 그 성과로 학계와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안젤라 덕워스는 그릿이라는 책을 쓴 후, 병석에 있는 아버지께 며칠에 걸쳐 그 책을 한 권 모두 읽어드렸다고 한다. 늘 바쁘게 성취를 위해 애쓰던 안젤라 덕워스가 언제나 자신을 비교 평가하던 아버지에게 자신의 책을 통째로 다 읽어드린 것은, 자신의 성취를 스스로 인정하기 위한 일종의 세리머니였을지도 모른다.
한때 펭수를 잠시 좋아했고 어떤 악기에 열정을 잠시 발휘했던 나의 내담자도, 이제는 자신의 끈기 없음에 쉽사리 좌절하지 않고 조금씩 자신만의 성취와 수고를 인정해 나가다가, 어느새 낱낱의 실패 앞에서 좌절 내성을 발휘하여 스스로를 믿고 자기만의 목표를 잘 정할 수 있길, 그래서 결국 자신의 그릿을 잘 발휘할 수 있길... mind
<참고문헌>
Duckworth, A. (2016). Grit: The power of passion and perseverance. New York, NY: Simon & Schuster.
Meindl, P., Yu, A., Galla, B. M., Quirk, A., Haeck, C., Goyer, J. P., Lejuez, C. W., D'Mello, S. K., & Duckworth, A. L. (2019). A brief behavioral measure of frustration tolerance predicts academic achievement immediately and two years later. Emotion19
(6), 1081–1092. https://doi.org/10.1037/emo0000492
박혜연 분당서울대병원 인권센터 | 임상심리 Ph.D.
대학병원 공공의료사업단에서 공직자 및 일반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관리와 정신건강 문제 예방 및 치료를 위해 일하고 있는 임상심리전문가이다. 경기도 소방심리지원단 부단장, 보건복지부 전문 카운셀러를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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