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채식주의자, 한강 (창비)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소설 <채식주의자>는 독자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동물도 식물도 아닌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지, 우리가 지닌 폭력성을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하는지, 인간에게 죽음은 과연 어떤 것인지 등 여러 가지 물음들은 마지막으로 책장을 닫는 순간까지 이어져 독자에게 여운으로 남는다.
소설 <채식주의자>에서는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영혜’가 등장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 속에서 그녀는 꿈을 하나 꾼다. 꿈속에서 ‘영혜’가 보았던 장면들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라 할 수 있는 폭력과 욕망의 잔상들이다. 그녀가 겪었던 내지는 그녀 안에 내재되어 있던 폭력성은 그녀의 무의식을 빠져나와 꿈을 계기로 표출된다.
계속해서 주인공을 죄여오는 꿈 속 환영들을 쫓아내기 위해,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된다. 그녀는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폭력이 만연한 이 사회를 벗어나고자 갖은 애를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꽃과 나무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녀가 본 식물은 타인을 해치지 않고 서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게 영혜는 식물이 되기를 희망하며 단식을 시작한다. 이 때 그녀에게 죽음은 그저 식물이 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인간이기를 거부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한편 영혜를 둘러싼 다른 이들은 어떠한가. 그저 평범함을 최우선의 가치로 놓고 하루하루 무난하게 살아가는 영혜의 (전)남편, 주어진 일에 성실히 임하며 살아가는 영혜의 언니 등 이들은 모두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상이다. 그들은 모두 무관심과 외면 내지는 자신이 지닌 욕망 등으로 영혜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들이다.
이는 오늘날 현대 사회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폭력의 형태들이다. 그들은 마치 책을 읽는 독자들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문화적 상징들을 활용하여 사람들에게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물음을 건네고 있다. 타인에게 가했던 물질적인 폭력뿐만이 아니라 외면, 무관심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들은 영혜의 무의식이 발현된 ‘꿈’의 장면들로 나타난다.
꿈은 미래에 대한 계시가 아닌 오늘날 인간들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과 동형성을 갖는다. 꿈과 현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꿈속에 비춰지는 허구는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또한 폭력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가슴’이 등장한다. 영혜에게 ‘가슴’은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생명력이자 포용력을 뜻한다.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는 영혜는 아직 타락하지 않은 순수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다. 그녀의 순수한 본성은 진실을 깨달을 수 있는 실마리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녀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가슴’은 이미 성적인 대상으로 파멸해버린 지 오래다. 인간에 내재된 욕망과 폭력성을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영혜는 인간이 아닌 땅을 받치고 물구나무 서있는 나무가 되기를 희망한다.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면서도 똑바로 서있는, 상승하면서도 하강하는 완전한 나무는 인간이 지닌 욕망과 본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고민들과 공감, 또한 이를 풀어낸 문화적 상징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은 채식과 웰빙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는 세계적인 추세에 편승하여 사람들에게 내재된 흥미를 유발한다.
독자들 마음에 남아있는 질문들이 제 길을 찾아 나서기를 바란다. 작가의 외침이 동물도 식물도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슴 깊은 속 울림이 되었기를 바란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pixabay
인용 출처 :『채식주의자』 한강, 창비
본문출처 : 민트별펭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