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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별펭귄 Dec 15. 2023

가슴뭉클한 SF 이야기 속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⑴

[책 리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허블)





<서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평상시 막연히 '미래'에 대해 고민할 때가 있다. 내 대부분의 상상은 디스토피아다. 기후변화로 인해 가뭄과 폭우 등 재앙이 넘쳐나는 지구, 경쟁사회로 인해 서로 간 가득 차 버린 불신, 저출산으로 인한 황폐해진 시골과 도시 집중 현상 등등, 나의 머릿속은 미래에 대한 모호한 암울함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 소설을 접했다. 과학이라는 학문에 한번 더 반하게 되었다. 그동안 내 삶과 동떨어진 것에 지나지 않았던 드넓은 우주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 SF소설을 궁금해 한다면 주저없이 이 소설을 추천할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따뜻하고 뭉클한 이야기를 전하며 우리에게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단순 막연한 미래예측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있을법한 미래를 예견하면서도 인류와 생명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가득하다. 물론 유전학, 물리학, 천문학 등 전문 용어가 나올 땐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 라는 뜻.―한 순간들이 있었다. 이해 못하는 논거들도 많이 나왔다. 문송한 순간도 잠시, 작가는 전문적 배경지식이 없는 나같은 사람이 보더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SF 장르로 알기 쉽게 서사를 풀어나간다. 


 과학기술 발전으로 펼쳐진 미래는 생각보다 신선했다. 작가가 그린 미래에는 우주여행이 보편화 된 삶이 있었다. AI, 로봇, 유전자 등 기계공학, 생명공학의 발전이 있었다. 상상만큼 암울의 끝판왕도 아니었으며, 지금 이 순간처럼 미래도 역시 인간이 살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각각의 단편들을 통해 저자는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계속해서 던진다.






| 단편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과학적 발전을 이룬 몇 백년 뒤 지구의 모습은 어떨까? 소설 속에서 보여준 미래와 유사할까? 데이지가 살던 '마을'은 진정한 유토피아일까? 완벽해진 신인류를 가진 '시초지'는 왜 불행해졌을까? 왜 순례자들 대부분은 시초지를 선택했을까? 


이 글은 독자에게 수많은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거야.


 데이지는 자신만의 답을 찾았다. 시초지로 가서 유의미한 변화를 위해 함께 노력한다. 과거의 잘못을 고치고 더 나은 삶과 사랑을 찾아 나선다. 데이지는 시초지에서 불행과 갈등을 겪고 또 공감하고 행복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무슨 답을 찾아야 할까?



 한편 우리들은 자주 우리들의 외관에 대해 불평을 하며 살아간다. 나는 눈이 작다는 것에 외적 자신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물론 나는 워낙 겁이 많고 '굳이?' 라는 생각에 성형 수술을 하지는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도 많지만 그럭저럭 적당히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소설 내용처럼 유전학의 발달로 유전자를 직접 디자인 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만약 내가 나중에 자식을 낳을 때 기술 발달로 유전자를 조작하여 내 아이의 작은 눈을 크게 바꿀 수 있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가 나쁘다고 여기는 열성적인 유전 요인들을 없애는 것이, 신인류를 보기 좋게 개량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행위일까? 과학의 발달로 시시각각 맞닥뜨리게 되는 윤리적인 문제를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논의하고 해결해 나갈 것인가?


 데이지와 소피,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심오한 철학적 물음을 찾아 우리들 자신에게 되묻는다. 





| 단편 |

스펙트럼



 작가의 여러 가지 단편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 중 하나이다. 나는 직접 주인공 희진이 되어 루이를 만나보는 상상까지 했다. 그만큼 낯선 존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차츰 유대감이 생겨나가는 과정들이 너무 따뜻하고 보기에 아름다웠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스펙트럼>에는 나의 편협하고 단순한 사고 방식을 넓혀 주었던 2가지 포인트가 있었다. 색채 그 자체를 언어로 사용하는 외계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 그리고 기억과 역사를 매개로 한 생명체와 또다른 생명체가 동일한 개체로 인식되어 살아가는 무리인들의 모습.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후자의 경우, 기억과 인간의 영속성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사고하게끔 만들었다. 그동안 겪었던 한 사람의 모든 경험과 기억들이 상실된다면 과연 그 이전과 이후의 사람을 동일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함께 공유했던 모든 추억이 싸그리 잊혀지고, 과거에 느꼈던 모든 경험의 기억들이 사라졌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한 사람을 한 주체로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김새, 이름, 가치관, 기억..? 점점 머리가 아파온다. 다음번에는 고대 철학가들의 철학적 가치가 담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한편 작가는 새로운 행성의 그들을 외계인이 아닌 무리인으로 부른다. 그냥 손쉽게 그동안 사회에서 통용되어왔던 외계인을 써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왜 그들을 무리인이라고 지칭했을까?


 외계인 저변의 의미에 인간과 대척점에 있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에는 수많은 SF 소설과 영화들이 있다. 그로 인해 독자들 머릿속에 남아있는 외계인에 대한 이미지들은 서로 제각각이다. 에일리언 같은 무서운 외계인, 기계로봇 형태의 차가운 외계인, 우주전쟁을 하는 금속 유기체 등등 부정적인 이미지들도 꽤 많은 편이다.



 따라서 작가는 희진을 챙겨준 외계 생명체들에게 '무리인'이라고 지칭 명사를 붙여준다. 우리와 다른 생김새와 다른 문화를 가졌다고 무작정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을 관찰하고 차근차근 이해해 나간다. 이름부터 한 겹 더 따뜻한 단어로 그들을 따스히 품어준다. 







| 단편 |

공생가설




결코 찾아낼 수도 없고
도달할 수도 없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위안을 주는
아름다운 세계

 루드밀라의 행성 전시회가 열린다면 꼭 가서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어졌다. 뇌과학을 토대로 펼쳐진 작가만의 공생가설이 기발하고도 정감이 갔다. 



 한편 나는 책을 읽고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오히려 루드밀라의 행성 하나를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가 아닌, 각각의 행성들과 각각의 인간들이 서로 연결된 존재였다면?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원소는 별의 원소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어디에선가 들은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각각 별들의 존재였더라면? 


 각각의 별들과 각각의 사람들. 별의 존재들은 지금 별의 기억을 잊고 지구를 살아간다. 그러나 별에 대한 그리움을 저마다 갖고 살아간다. 점차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가 새로운 소설의 장을 머릿속으로 넘겨본다. 







| 단편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책을 덮고는 할머니의 감정을 차마 짐작도 할 수 없어 먹먹해졌다. 서평을 쓰기 위해 한번 더 책을 들춰봐도 가슴이 아려오며 찌르르 울린다. 동면과 해동을 반복하여 수백 년을 살아온 그녀의 마음을 차마 알 길이 없다. 


동결은 대가 없는
불멸이나 영생이 아니야.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눈을 뜨는 순간이 있어야 하고

그때마다 나는 내가 살아보지도 못한
수명을 지불하는 기분이 들지




 좋은 소설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수많은 질문과 사회적 함의가 들어가 있다고 느낀다.


 우리가 새로운 기술 혁명을 받아들일 때 기존의 시스템과 가치들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뒤따라 왔다. 이는 과학의 발전에 우리들의 도덕적, 규범적 가치관을 어떻게 함께 발전시킬 수 있느냐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고 인류적 차원의 공감과 다방면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아직 우주 개척 시대가 막을 연 것도 아니지만 소설 속 작가의 말이 공감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있다. 서로 간 점점 더 분열되고 극단적인 사고와 가치들이 판치고 있다. 


 우리는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대응하기는 커녕 한 공동체의 사회적 합의조차 도출해 내지 못한다. 앞으로 더 발전해 나갈 미래를 위해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할지 작가는 한 단계 성숙한 방식으로 고민의 자세를 제시한다. 







<결론>

····· 나는 미래의 암울함을

희망의 빛으로 바꾸고자 

노력할 것이다. 




 앞에서 나는 미래를 암울하게 내다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바꾸고 싶다. 암울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밝게, 희망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고 싶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환경을 아끼기 위해 신경써서 재활용을 하고 물건을 오래도록 아껴서 사용하고, 사람들에게 더욱 친절히 대하고, 사람들이 있는 장소라면 따스한 인간의 숨결이 머물도록 만드는 데 한조각의 도움이 되고 싶다. 


 작가는 글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나는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나는 오늘도 글을 읽고 쓴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pixabay

인용 출처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허블

본문 출처 : 민트별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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