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 이전의 나
닫힌 방 안, 낡은 설계도 위에서
나와 ‘나’는‘괜찮은 사람’이라는 얼굴을 한, 파사드를 마주했다.
4화에서는 그 뒤를 받치고 있는 두꺼운 외벽,
그리고 외벽을 세운 기둥과 보이지 않는 내벽의 하중을 따라간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흔들릴 수 없다고 믿었던 마음.
책임감이 재료가 되어
차곡차곡 쌓인 벽.
그 두껍고 단단한 벽 앞에서
조용히 묻는다.
"나는 무엇을 지키고 있었을까."
나와 마음의 ‘나’는 다음 장을 넘긴다.
어떤 쓰임인지 알 수 없는 도면.
구역은 오직 선으로만 나누어 있다.
‘부모니까, 자식이니까’
‘아내니까, 남편이니까’
‘장녀니까, 막내니까’
‘며느리니까, 사위니까’
어떤 집에서는 그걸 ‘질서’라고 부르고,
어떤 집에서는 ‘도리’라고 부르고,
어떤 집에서는 그냥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보이지 않는 벽과 문턱과 같은 말들로 그려져
경계를 나누고 있는 조닝(Zoning) 플랜이다.
┃‘역할’은 선으로 그려지지 않지만
구조처럼 사람을 고정시킨다
나는 도면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마음의 ‘나’를 바라보았다.
나:
“이 선들… 다 네가 그은 건 아니지?”
마음의 ‘나’:
“응. 대부분은 이미 그어져 있었어.
나는 그 안에서 움직이는 법만 배웠지.”
조닝플랜만으로는 알 수 없어
내부 투시도(Perspective)를 펼친다.
현관에서 시작된 긴 복도.
그 복도를 따라
방문이 없는 아치가 여럿 보인다.
그중 하나의 아치를 들어가니
또 여러 개의 문이 나타난다.
나:
“여긴 어디야?”
마음의 ‘나’:
“나의 친정”
나:
“여기, 큰 문이 부모님 방인가 봐.”
마음의 ‘나’:
“아니. 연년생 남동생 방.”
가족의 관심과 에너지가
가장 많이 흘러들어 간 문.
2대 독자 장손.
원하는 것을 분명히 말할 줄 알았고,
싫은 건 싫다 말할 줄 알았고,
소리를 크게 낼 수 있었던 아이.
그 손에는 대부분의 것이 쥐어져 있었다.
나:
“그럼, 저 복도 끝 작은 문은?”
마음의 ‘나’:
“그건 나.”
설명은 짧았다.
복도 끝에 덧붙여진 듯한 작은 문.
나는 그 문을 한참을 본다.
‘나’는 장녀인데.
┃눈에 잘 띄지 않는 방은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설계기획서를 펼친다.
클라이언트의 니즈(Needs)가 적혀 있었다.
손이 덜 가는 아이
크게 요구하지 않는 아이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
양보를 잘하는 아이
특이사항: 주 양육자-할머니
나:
“이 요구사항… 네 얘기지?”
마음의 ‘나’:
“응… 어머니를 도와 드리고 싶었어.
동생과는 반대의 모습으로”
그 말에는
자랑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오래된 사실처럼 담담했다.
도면의 여백에는
가족의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적혀 있다.
아버지의 회사가 흔들리던 때.
이것 좀 해줘
네가 도와줘
네가 없었으면 우리 가족은 흩어졌을 거야
어느새 ‘나’의 이름은
자녀를 넘어 기둥에도 쓰여있다.
3번 기둥: 빈 것을 채우는 사람
보강재: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
마음의 ‘나’:
“그때 나는…
딸이 아니라 이미 집의 세 번째 어른이었어.”
┃아이는 가족을 구하지 않지만
구조는 아이를 그렇게 만들 수 있다
나는 페이지를 넘긴다.
동생의 방,
그 위에는 수정선이 빼곡하다.
별표표시
특별 지원 대상
그러한 이유로
‘나’의 도면에서도 수정된 항목들이 있다.
저축 면적 축소
나를 위한 시간 삭제
양보 영역 확장
그래서 너그러움 축소
나:
“가족 도면을 보강하는 동안, 네 방은 점점 줄어들었구나.”
마음의 ‘나’
“… 가족이니까… 내가 여력이 된다고 생각했어.
근데 억울했나 봐. 그때 뒤늦은 사춘기가 왔거든.
나이 서른이 지나서...”
┃지연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를 바꿔 돌아올 뿐이다
‘나’의 방 도면에서
굵은 선을 따라가자 도면 하나가 연결되어 있다.
새로운 기둥.
‘나’의 ‘배우자’
’나’의 20살부터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
가장 힘든 시절 의지했던 사람
짜증을 다 받아주던 사람
그럼에도 늘 먼저 미안해하던 사람
과묵한 사람
특이사항: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나는 더 해주고 싶은데, 표현이 잘 안 돼.”
마음의 ‘나’:
“미안함을 배우기 시작한 자리야.”
배우자라는 기둥이 세워지며
시가 존(Zone)이 추가됐다.
참조: ‘시가 배치도’
장남 방: 집이 서려면 튼튼해야 하는 방
그러나 엄마에겐 가장 안쓰러운 아이
그리고 안쓰러운 아이들 여럿
막내 방(신랑): 알아서 잘 큰 아이
그 옆에는 여러 개의 화살표가 이어져 있었다.
우리도 자금 있으면 잘 될 텐데
→ 막내에게 이야기해 봐
조카들 용돈 좀 보내
→ 막내오빠한테 전화해
이름은 막내아들. 실제 하중도 막내아들
┃이름은 막내지만 역할은 기둥이 되는 경우가 있다
한쪽 구석, ‘나’를 향한 메모가 붙어 있다.
엄마라고 불러
그래도 도리는 지켜야지.
그리고,
수차례 수정된 체크리스트
정서 점수표, 도리 비교표
심사위원: 시부모, 장남, 시누
그리고 동서(정치 역량에 따라 바뀜)
마음의 ‘나’:
“이 집에서 나는 얼마를 해도 부족해.”
무거워진 마음에, 나는 몇 장을 더 넘겨
‘나’의 가족 존(Zone)을 먼저 본다.
구조는 단순하지만 무겁다.
말보다 역할이 먼저 움직이는 가족
늘 멈추지 않고 달린다
필요 이상으로 책임을 진다
말해야 할 것을 삼킨다
감정보다 정리를 먼저 한다
겉모습은 멀쩡해 보인다
서로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그리고 별도의 블록
남편의 회사동: 남편 이름 선명
“회의, 실적, 출장, 피로”
‘나’의 회사동: 이름 흐릿
다양한 커리어
밤낮 없는 공부
늘 시간에 쫓김
나:
“이 집은… 기본 구조는 괜찮은데,
모든 기둥에 하중이 너무 커.”
마음의 ‘나’:
“그래서 다들 안쓰럽고, 그럼에도 서로 잘 이해하려고 해.”
┃겉으로는 멀쩡한 집 안으로는 애처로운 집
앞에서 넘겼던
각 존의 경계가 확대되어 있는 부분도(Partial Plan).
그런데 도면이 멀쩡하지 않다.
찢어지고 구겨진 폐자재처럼 붙어 있다.
내가 자라온 집의 무게, 남편이 자라온 집의 무게가
서로를 밀어붙이며 있다.
이것은 경계 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시가’와 ‘친정’의 싸움도 아니었다.
이 전쟁은
‘나’와, ‘나’의 배우자,
각자의 집을 등에 진 두 사람 사이의 전쟁이었다.
가족의 갈등은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짊어진 구조의 충돌일 때가 많다
양가의 한 마디가 방아쇠가 된다.
사소한 말 하나가
폭발의 방향을 바꾼다
각자 다른 집에서 배운
‘가족을 위해 어디까지가 내 몫인가’가 부딪히는 자리.
서로가
자신다움을 잃는 모습에 대한 '걱정'을
'분노'라는 언어로 튀어나오는 자리.
나:
“잘못은 너희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싸우는 거야?”
마음의 ‘나’
“… 서로가 너무 안타까워서.”
나:
“지켜보는 마음이었구나.”
마음의 ‘나’
“응. 늘 애쓰며 살아온 사람을 지키고 싶었어.”
잠시 침묵이 흐른다.
도면 위의 찢긴 자국들이
그제야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다.
나:
“마음고생 많았네…
너희가 싸우지 않아도 되는
평화 속에 머물 수 있으면 좋겠어.”
┃사랑이란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상대가 무너지지 않도록
곁에 서 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도면의 균열은 아직 그대로다.
하지만 그 균열이 생긴 이유만큼은
이제 분명히 보인다.
이번에는
내가 넘기기도 전에 ‘나’가 도면을 펼친다.
아이들 방.
평면보다 천장 조명 계획(Ceiling & Light Plan)이 눈에 들어온다.
나:
“아이에게 조명을 많이 쏟고 있네.
너 자신을 비추듯.”
마음의’나’:
“나는 아이들에게 차별 없이 관심을 주고 싶었어.
딸아이에게는 특히 더.”
그래서 딸아이 방 천 정도에는
직접 비추는 등(Lighting)이 더 빽빽이 그려져 있다.
무조건 공감
무조건 이해
모든 걸 알아야 하고
말하기 전 챙겨주고
어려운 건 대신해 주고
밀착 경호
나: 이게 아이들을 비추는 빛이라고 믿었구나.
마음의’나’: “응. 하지만 지금은…”
말을 흐린다.
그래서일까?
하단에 ‘나’에 대한 경고 메모가 있다.
질문 과다
관찰 과잉
여백 필요
마음의 ‘나’:
“어릴 때… 아무도 나에게 물어봐 주지 않았어.
내가 뭘 느끼는지, 왜 그러는지,
뭐든 혼자 답을 찾아야 했지.
그래서 아이를 키우면서 늦은 사춘기가 온 것 같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의 ‘나’:
“그리고, 모르는 채로 두는 게 무서워서
공부했고, 알게 된 건 다 알려주고 싶었어.”
나: “아이들을 위해서였겠지.”
마음의 ‘나’
“응. 그땐 그게 사랑인 줄 알았어.”
잠시 도면을 내려다본다.
빛이 너무 많은 방처럼,
아이의 공간에 여백이 없었다.
┃결핍의 반대로만 설계하면
언젠가 다른 형태의 과잉이 된다
묻지 못했던 아이는
묻는 어른이 되었고,
기다려 주지 못했던 시간은
앞서 가는 관심이 되었다.
사랑은 넘쳤지만,
공간은 숨 쉴 틈이 없었다.
‘나’는 옐로 페이퍼를 꺼냈다.
역할 배치도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아직은 모른다.
어떻게 고칠지는.
그래서 작은 네모를 하나 그렸다.
내 마음 챙김방 가설(임시 설치)
설계지침:
이 방에서는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다
도리·기대·성취는
잠시 문 밖에 서 있는다
마음의 ‘나’:
“이 방에는 누가 들어올 수 있어?”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짧게 말한다.
마음의 ‘나’:
“나. 그리고 나를 ‘나’로 보는 사람.”
┃나는 역할이 되기 전에, 이미 나였다
작은 방 하나가 생기니,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이 열리고 닫히기 시작할 것 같다.
┃건축 일기
나는 오래도록
‘해야만 하는 사람’으로 서 있었다.
외벽은 괜찮아 보였지만,
그 안에서 나는
쉬고 싶다는 욕망도,
아팠다는 감정도,
힘들었다는 고백도
여백에만 남겨 두고 살아왔다.
이제야 알겠다.
오늘의 무게는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오래된 설계가 계속 작동한 결과였다는 것을.
그래서 역할을 내려놓아도 괜찮은
작은 방 하나를, 내 마음 한가운데에
임시로 세웠다.
이 작은 공간이
앞으로 어떤 집을 지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 나는,
나를 잃지 않는 방식으로 다시 지어질 것이다.
사람은 역할 위에 서서 살아갈 수 있지만
역할이 사람 위에 포개질 때
서 있는 방향을 잃어버린다
집을 지키는 일과 나를 잃지 않는 일은
반드시 같은 선 위에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나를 지킨다.
┃'마음건축소 · 인사이트룸'은 쉬어갑니다.
다음 주 BUILD 1〈내 마음의 도면을 펼치다〉의 5화
‘낡은 설계도 · 입면도 점검’에서는
또 다른 파사드, ‘내벽’을 지키는 구조에 대해 살펴보는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오늘도 마음건축소와 함께, 머물러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신의 마음 공간 한쪽에,
한줄기 햇살이 스며들었기를 바랍니다.
SUN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