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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드빌더 Apr 10. 2023

내가 많아져서 다행이야

자아복잡성

Who am I?

What am I?

Why am I here?


TCI (기질 및 성격검사) 워크샵을 할 때 자기 개념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화두로 던지는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첫 번째 질문은 나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두 번째 질문을 설명할 때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얼마나 다양한 역할을 맡고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 번째 질문은 협의로 봤을 때는 지금 여기에서 강의를 듣는 개인적인 동기와 중요성일 테고, 넓게 보면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정체성과 역할과 의미. 모호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 삶에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질문이고, 아주 구체적인 수준에서 대답할 수 있는(적어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좋을 만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어느 시점의 나에게는 성취와 성공이 참 중요한 목표였고, 그렇게 '잘 해내는' 것이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특히 일이나 학업에서 그랬던 것 같다.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 아쉬움이 크셨던 나의 어머니는, 그리고 공부 잘하는 딸 외에는 별다른 삶의 낙이 없어 보였던 어머니는 "꿈을 크게 가져라", "날개를 활짝 펴고 하고 싶은 걸 해라",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씀을 종종 하시곤 했다. 소풍날이며, 수능날이며, 생일이며, 특별한 날이면 종종 엄마는 나에게 편지를 써주셨다. "너는 나의 기쁨이다", "네가 잘해서 감사하다" 하는 말과 함께 큰 꿈에 대한 격려도 함께.


나에게 그 말들이 꿈을 크게 갖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날개를 펴지 않고 조용히 걸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뭐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약간의 압박으로 다가왔다는 걸 엄마는 알까? 친구들은 부러워하던 엄마의 편지였는데, 내 마음은 조금은 무거웠던 것만 같다. 실제로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공부를 잘하는 것이라고 느꼈던 것만 같다. 조금 더 자라서는 예쁘게 차려입고 다니면서 공부도 잘하는 딸이 되는 것이었고. 지금은 엄마를 더 잘 이해하고, 그때의 비난하려 하는 건 아니지만, 어린 나에게 엄마의 말은 큰 무게였다. 


나는 잘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원래부터 갖고 있던 성취욕에 우연한 성과가 반복적으로 뒷받침되고, 엄마의 기대는 점점 자라나면서, 아주 오랜 시간, 유년기간과 청소년기를 보내는 동안 이런 강박이 날 따라다녔다. 


오늘 아침 출근길, 월요일 아침이라 더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문득 떠올랐다. 주말 동안 상담실 운영이나 내담자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고 지냈다는 사실이. 늘 머릿속이 논문과 연구로 가득 차 있던 대학원 시절, 온통 만났던 환자들을 개념화하고 이해하고 글로 정리하느라 머릿속에 보고서가 떠다녔던 병원 수련 시절, 개업 초기 아침이며 저녁이며 주말이며 계속 생각나던 내담자들 이야기까지. 연애도 하고 놀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차지하던 '일'이, 이제는 전부가 아닌 부분이 되었다. 여전히 나에게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모든 걸 쏟지는 않아도 되는 부분 말이다.


내담자들이 일이나 관계 문제로 상담실을 찾을 때 간혹 하는 질문이 있다.


그 일이, 지금 OO씨 인생의 몇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나요?


많은 경우, 힘들면 힘들수록, 이 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80, 90 이상이 되곤 한다. 한 가지가 중요해지면, 그곳에서 생기는 좌절이나 상처가 내 전부를 아프게 한다. 다양한 나를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어딘가에서 아프더라도, 어딘가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쉴 수 있으면 좋겠다. 어딘가에서 차갑다 느끼더라도, 어딘가에서는 따뜻하게 두 다리 뻗고 누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회복할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혼자여도 괜찮게 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다행이다.

아내가 되어서 다행이다.

엄마가 되어서 다행이다.

내가 많아져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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