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갚을 것이다.
오늘 아침, 이제 5월이면 세 돌을 맞을 하나밖에 없는 딸의 돈 200만 원을 훔쳤다. 계획된 도둑질이었다. 어젯밤, 혹시 잊을까 봐서 핸드폰 위젯으로 크게 깔아 둔 투두리스트에 적어두기까지 했다. '200 입금'이라고. 누가 보면 현금을 은행에 넣으려나 보군 하고 생각할만한 중립적인 단어를 골랐다. 절대 아이가 받은 것은 건드리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아직 계좌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양가 어른들이며 이모, 고모의 용돈을 그대로 모아둔 서랍이 있다. 돌반지며, 한 번씩 외할머니가 주시는 용돈 만원, 세뱃돈 봉투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내가 뒤진 봉투는 돌잔치 때 받은 봉투였다. 조각천으로 곱게 만든 매듭이 있는 주머니에 가족들이 첫 돌을 축하한다고 건네준 봉투들이 받은 상태 그대로 들어있었다. 양가 어른들이 주신 백만 원짜리 봉투 두 개를 찾아 대강 액수를 확인하고 소매춤에 숨겨서 핸드백에 넣었다. 어설픈 007 작전이 따로 없었다.
남편은 식탁에 앉아 식사 중이어서 내가 움직이는 동선이 보였으리라. 여간해서는 비밀이 없는 우리인데 차마 카드값 때문에 아기 돈 200을 가져가야 한다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창피했다. 숨겨야 했다. 이러고는 오늘밤쯤에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조금 일찍 출근해서 입금을 하려고 ATM으로 가는 길, 체크카드 때문에 꺼낸 나름 명품지갑을 보고 마음이 쓰다. 지갑 같은 거라면 아웃렛 명품 매장에서 하나쯤 사서 쓰기도 하고 수백 만원짜리 시계 한 개는 가지고 있는 삶이다. 남들 다 가진 것 같은 샤넬 백, 벤츠는 없어도 나름의 소박한 사치를 부리면서 궁핍하지는 않은 생활이다. 기분 좋자고, 남부럽지 않게 뭔가 갖춰보자고 한 번씩 수십 만 원짜리(수백 만원이나 수천만 원은 아니다) 무언가를 질렀던 것도 후회가 된다. 더 알뜰했어야 해. 더 규모 있게 살았어야 해. 더 계획적이었어야지. 하는 반성이 마음을 짓누른다.
나는 3인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남편은 연극배우라는 직업 특성상 돈을 벌기가 쉽지 않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남편은 대단한 생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고, 돈벌이에 충분한 기술이나 자격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남편이 돈을 버는 일에 집중하는 순간 그가 좋아하고 잘하고 싶어 하는 일을 잘 못하게 된다는 걸. 나는 다행스럽게도 좋아하고 잘하고 평생 하기로 한 일이 돈벌이도 따라오는 일이다. 남편이 생계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다. 남편이 돈을 번다고 해서 내가 일을 안 할 것도 아니고, 내가 조금 더 부지런을 떨면 충분히 우리 셋이 먹고살 수 있다. 남편의 커리어에 뜻 모를 행운이 깃들어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통해서 많은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요행을 바라지는 않고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결혼할 때 나는 의지를 가지고 생계를 책임지겠노라, 당신은 배울 것을 배우고 하려는 일에 최선을 다 해라 하고 말했다. 다 때가 있을 거라고. 언젠가 자기가 벌면 나는 좀 놀게 하면서. 그래서 남편은 육아와 집안일을 더 신경 쓰면서 보컬레슨이며 안무 수업이며 필요한 것을 단련하고 공연 준비에 들어가면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모든 일을 저글링 한다. 나는 탄력적으로 근무시간을 운영하며 경제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어렵지 않은 계획이었는데 아이가 엄마인 날 너무 그리워하고 같이 있는 시간 내내 심한 투정을 부리며 관심을 끌어대고 저녁상담이 많아진다 싶으면 여지없이 비뚤어져서는 요구적으로 변해서 힘이 든다.
내가 아이 때문에 일을 줄이고 싶으니 남편에게 조금만 경제활동을 해주면 안 되겠느냐 하고 부탁하면 남편은 들어주겠지. 그리고 그 성격에 잘하겠다며 애쓸 거다. 공연과 병행하느라 당장은 불안정한 일을 하게 될 테고, 내가 반나절만 일을 더하면 될 일을 남편을 며칠씩 고생시키고 싶지가 않다.
남편도 대단히 살림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카드값의 상당 부분을 계획도 없이 빵꾸(맞춤법 검사는 펑크라고 알려주지만, 어감을 잘 살리는 말은 단연 빵꾸다)를 낸 것은 내 책임인 것만 같다. 너도 잘 못 하는데 나도 못할 수 있다는 합리화는 너무 못났다.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너무나도 치사하게 남편과 내 상황에 대한 약간의 야속함이 못내 찾아오고 내가 이렇게 치사해서 못나 보인다는 자괴감이 뒤따른다.
기다리는 내담자 분들도 많으신데, 나는 게으름을 부리지 말아야지. 조금 더 타이트하게 할 일을 해내야지 하고 다짐해 본다. 우습게도 수입이 많은 달이면 혼자서 괜히 당당하고 기분이 좋다. 주변 사람들에게 여유로워지고 딱히 돈을 쓰지는 않더라도 돈이 들어갈 만한 풍요롭고 즐거운 활동에 열린 마음이 된다. 돈 자체보다도 그 여유 있는 마음이 좋다. 그래서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일을 적게 하고 돈을 많이 버는 일에 대해서 늘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누구도 등쳐먹으면 안 된다고, 돈을 받으면 값을 톡톡히 잘 해내야 한다고 다짐한다. 필요한 교육들에 수백만 원씩을 지출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더 잘 해내고, 더 멋지고 성숙한 삶을 살아내고 싶다.
꼭 갚아야지. 딸아. 너에게 비밀로 한 상태로 아직 네가 상황을 모르는 나이에 나는 이 일을 되돌릴 거야. 있던 봉투 그대로 꺼낸 돈을 고이 넣어주마. 계좌도 얼른 만들어줄게. 많은 걸 견디고 있는 네가 대견하고, 엄마도 더 열심히 엄마의 일을 할게. 적게 일하고 많이 벌면서 많이 놀아줄 수 있는 방법을 꼭 찾으마.
어두운 마음으로 글을 쓰다 지금쯤 오니 웃퍼진다. 남편 이야기까지 나올 줄 몰랐던 글. 이 글은 남편 카테고리에 넣어야겠다. 여보, 나 고생하고 있어요. 나중에 웃으며 말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