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보다 잔인한 진실
남편을 보내고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아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고,
마음도 좀 추슬러지는 느낌이었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면,
문 앞까지 뛰어나오던 도하가 있을 것 같았지만.....
아이들과 놀러 다니며 찍은 사진이 많아지며 폰에 저장 공간이 없어졌다.
폰 사진을 컴퓨터로 옮겨 주는 일은 도하의 일이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이 되었네. 귀찮아......'
노트북에 외장 하드를 꼽았다.
날짜를 지정해서 사진을 옮기고,
문득 남편의 모습이 그리웠다.
'내가 몰랐던 모습의 사진은 없을까?'
폴더 하나하나를 클릭하고 있었다.
도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사진이 많이 없다.
아쉬워하던 중,
낯선 이름의 폴더를 발견했다.
'김혜인'
누구지?
애써 떠올리려고 해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냥 도하가 아는 사람일거라 생각했다.
그 폴더를 클릭한 순간......
등으로 서늘한 기운이 뻗쳤다.
그리고 이내 끝없이 절망했다.
내 인생의 모든 순간들이 비참해지는 찰나였다.
그 파일 안에는 사진이 몇 장 있었다.
엔틱 한 레스토랑에서 마주 보고 다정하게 웃고 있는 사진,
한 음료에 빨대 2개를 꼽아 같이 마시며 즐거워하는 사진,
그리고,
입을 맞추고 있는 사진이었다.
도하의 사랑스러운 눈빛, 밝은 미소가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기까지 했다.
사진을 응시하는 동안 내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마음속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사진 한 구석 날짜가 보였다.
결혼 초, 여자 문제로 한 차례 위기가 있었기에,
그 여자일거라 생각했고,
그 당시 일이라면 그냥 넘길 심산이었다.
'한번 용서했던 일이니까...'
그 날짜는 내가 베푼 아량을, 보기 좋게 비웃었다.
사진 속의 그날은
우리가 다시 함께 하기로 마음먹고 도하가 직장을 옮기며 잠시 떨어져 있던 때였다.
아주 사이가 좋을 때,
매일 사랑한다며 통화하던 그때.....
손이 떨리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내 몸은 끝없이 바닥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속에서부터 독기가 스멀스멀 차올랐다.
하지만 화를 낼 곳도 받아줄 곳도 없다.
그 여자를 찾아가 머리채를 잡을 수도 없다.
누군가에게 기대기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비참하다.
죽은 사람이 이렇게 화나게 할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
내 마음 정리가 조금 될 때까지는 침묵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길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이건 도하가 죽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아니,
살아오며 겪었던 어떤 상실보다 더 거대한 절망이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 전체가 거꾸로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다음날,
그다음 날도,
일주일이 지나도 나의 분노는 조절되지 않았다.
그녀가 누군지 알아내서,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남은 내 삶을 망치는 일이 될 것 같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민낯을 모두에게 보여줄까?'
'그럼 뭐 해. 상처는 결국 나와 아이들의 몫이겠지.'
지금
나는
네가 남긴 아이 둘을 키우고
너의 어머니와 함께 살며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배신이 세상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말할 때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내 밑바닥의 심정을 숨긴 채
아이들에게 웃으며 말을 하고, 밥을 하고, 출근을 했다.
평온해 보이는 일상 속,
내 안에 많은 것들이 소용돌이치며 변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의 나는,
나조차 낯선 사람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수요일에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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