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마음이 재혼의 열쇠였다
부모님의 허락은 그저 절차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허락은, 내 인생을 결정짓는 심판과 같았다.
그 마음이 닫혀 있다면 내 사랑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오늘도 자기 전 둘이 장난치다 한판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잠에 들었다.
곤히 잠든 두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으려니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조용한 방에 우리 셋.
엄마의 그늘만으로 해맑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아빠와의 사별에 이제야 조금씩 적응하고 있는 두 아들
며칠 전 이준이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장난스러운 미소로 나를 보며
"엄마 누구 만나고 있어요? 새아빠 있으면 좋냐고 물어봤었잖아요."
"어... 그게 쉽니? 때가 되면 좋은 사람이 생기겠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바쁜 척 넘기려 했다.
"가만히 있는데 좋은 사람이 생겨요?"
말끝에 내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 했다.
놀림받는 기분이었지만,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흘려보냈다.
'설마 뭔가 알고 있는걸까?'
이 아이들에게 새아빠는 어떤 느낌일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준 12살, 이현이는 8살
아이들이 막상 민결을 만나면 어떻게 반응할까?
친해지려고 할까?
경계할까?
아빠가 떠올라 말없이 아플까?
시작을 하려면 사춘기는 피하는 게 좋겠다는 어른들의 조언에 마음이 조급한 것도 있었다.
'엄마랑 만나고 있는 분이야. 아빠가 될지도 몰라.'
차마 이렇게 소개해줄 수 없었다.
'엄마는 좋으니까 어지간하면 너도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이런 압박을 주고 싶지 않아서.
난 그저
아이의 눈으로 민결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떠밀리듯 선택이 아니라
내 욕심이지만
아이가 저 사람이 내 아빠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빠가 되길 바랐다.
아이에게 집중해서 생각하다 보니
한 달 안에 허락을 받고, 부모님이 한국에 계실 때 재혼까지 하겠다는 목표.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이준이 이현이가 상처 없이 새아빠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긴 인생 중 큰 사건이 상처 없이 잔잔히 스며들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
"빨리 가고 싶다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다면 함께 가라."
는 아프리카의 속담이 생각났다.
결국 나는 엄마에게 마음을 털어놓기로 했다.
"엄마, 난 아이들이 경계하지 않고 민결씨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애들 입으로 아빠 하고 싶다는 말 듣고 재혼하고 싶어요.
너무 큰 욕심일까요?"
엄마는 동의의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엄마는 네가 다시 가정을 잘 꾸리면 더 이상 걱정이 없겠어.
그리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잘 자라준다면 정말 바랄게 뭐가 더 있겠니?"
사별한 딸아이와 매일 통화하면서 내 목소리의 톤을 살폈던 엄마의 마음이 떠올라 믿음이 갔다.
엄마와 나는 한 팀이 되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저런 대화 끝에 우리의 계획이 정리되었다.
"그럼 이렇게 해보자."
엄마가 잠시 숨을 고르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셨다.
"민결씨는 예전부터 교회를 통해 우리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야.
아빠에게 안부 인사를 드리러 오는 거고, 그 자리에 너랑 아이들이 함께 있는 거야."
나는 심호흡을 했다.
너무 완벽해 보이지만 동시에 아찔한 계획이었다.
내 눈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단단하게 빛났다.
숨이 막히도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겠니?
네 남자친구는... 괜찮겠어?"
"잘... 말해볼게요."
목소리가 떨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민결에게 미안함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계획은 치밀했지만, 마음속 불안은 더 커져만 갔다.
애들 입장에서는 나도 그날 민결을 처음 만나는 것이고,
민결은 처음 보는 우리 부모님 앞에서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호칭은 나와의 관계를 감춘
"선생님"으로 하기
이 상황은 다시 말해...
엄청 떨릴 민결을
내가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난처한 마음으로 민결에게 동의를 구했다.
민결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그 방법 괜찮은 것 같아.
내가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원한다면 해볼게."
민결의 작은 한숨에서 떨림이 묻어났다.
그 떨림이 내 가슴을 쿵 내려앉게 했지만,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이틀 후 토요일이야.
우선 아이들 마음을 사야 해.
부모님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우리 해보자."
예전 깐깐했던 부모님의 매서운 시선이 떠올라, 숨이 막히듯 가슴이 떨렸다.
그러나 그 열쇠는 결국 아이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