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철학 ④] 엔진이 멈추기 전에 해야 할 일

매뉴얼 앞에 숙이는 겸손

by 자아

선박의 엔진룸에는 PMS(Planned Maintenance System, 계획 예방 정비)라는 지독한 규칙이 존재한다. 기계가 고장 나기 전, 정해진 가동 시간이 되면 부품을 분해하고 점검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 시스템을 완벽하게 가동하기 위해 엔지니어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기술력보다 ‘겸손’이다.


경험이라는 덫, 매뉴얼이라는 정답

나는 배의 모든 기계가 문제없이 돌아가도록 관리하는 사람이지만, 냉정히 말해 나의 지식은 '넓고 얕은' 편에 속한다. 엔진룸에는 수천 개의 기계가 있고, 그것들은 메이커(Maker)마다, 타입(Type)마다 정비 방법이 모두 다르다. 10년 넘게 바다 위에서 기계를 고쳐왔지만, 나의 경험과 감각만으로 모든 기계를 정복하려 드는 것은 오만이다.

진짜 예방 정비는 나의 지식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메이커 측에서 권고하는 정비 지침서(Instruction Book)를 있는 그대로 따르는 과정이다. 내가 아는 방식이 더 빠를 것 같고, 지난번에도 이렇게 해서 문제가 없었다는 유혹이 찾아올 때 그 고집을 꺾는 것. Maker가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완성한 매뉴얼 앞에 나의 얄팍한 경험을 내려놓는 것. 엔지니어링의 세계에서 이것이 바로 '겸손'이다.


내 인생의 '메이커'가 보낸 지침서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에고(Ego)를 과신하며 삶을 정비하려 든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생각으로 타인의 조언을 무시하거나,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증명된 삶의 지혜들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내 마음이라는 복잡한 기계가 삐걱거릴 때, 내 고집대로만 수리하려 들면 결국 더 큰 고장을 불러올 뿐이다.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며 나는 인생의 매뉴얼을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싯다르타나 니체같은 선구자들이 남긴 기록은, 인간이라는 복잡한 시스템을 먼저 연구한 '메이커'들이 남긴 소중한 지침서와 같다. 내 생각이 정답이라고 우기기보다, 이들이 남긴 보편적인 원리 앞에 고개를 숙이고 내 삶을 비추어보는 것. 그것이 번아웃이라는 거대한 브레이크다운을 막는 가장 확실한 예방 정비다.


겸손한 항해는 멈추지 않는다

예방 정비는 결코 화려한 작업이 아니다. 기름때를 묻혀가며 멀쩡한 부품을 닦고 조이는 지루한 반복일 뿐이다. 하지만 나의 경험보다 매뉴얼의 정확함을 믿는 겸손함이 있을 때, 배는 비로소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멈추지 않을 수 있다.


오늘도 나는 거만한 자아를 내려놓고 삶의 매뉴얼을 펼친다.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그 낮은 마음이, 역설적으로 나를 가장 단단하고 안전한 항해자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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