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리를 지키고픈 마음
로봇 시대의 다정함에 대하여
“미래의 빈부격차는
휴먼 로봇을 살 수 있느냐에서 온대요! “
”아하! 그러면 보급형이냐, 고급형이냐.
어떤 휴먼로봇을 고용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게 새로운 계급세계가 되겠다. “
오늘 점심시간 휴머노이드와 관련되어 직장 동료들과 나눈 대화가, 밤이 된 지금 계속 맴돈다.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이지만 어쩐지 이미 시작된 듯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사람의 힘은 ‘기술력’이 아니라 ‘마음력’이라는 믿으며 살았지만 이제는 이런 생각조차도 너무 낭만적인 걸까, 문득 마음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인간을 닮은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는 시대, ‘누가 더 인간을 닮은 혹은 다양한 기능을 하는 로봇을 가졌는가’가 빈부격차를 의미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현실감 없는 상상
아니다. 사실 이미 그러한 시대일까?
핸드폰이나 차량 종류, AI 사용 빈도, 가전과 소프트웨어의 수준… 이 모든 것이 이미 우리 일상에 있으니까 현실감 있는 상상일까?
서늘한 이유는,
이미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갖고 있는 것’으로 서열화되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그것이 집이든, 외모든, 학벌이든, 이제는 ‘로봇’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어 갈릴뿐 미래에도 빈부격차는 사라지지 않는다니…
세상이 변해도, 기술이 발달해도, 그 불균형은 형태만 바꾼 채 계속 존재할 거라는 체념 같은 예감이 든다.
휴먼로봇을 가진 사람과, 그것을 살 수 없는 사람 사이의 격차는 언젠가 ‘효율’과 ‘속도’의 차이를 벌려놓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기계를 곁에 두고 살게 될 것이다. 보급형이든 고급형이든, 누구에게나 어떤 형태로든 ‘도우미’ 로봇은 … 식당에 그것이 크게 낯설지 않은 지금처럼 보편화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상 속에서도
나는 문득 ‘인간 존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그 마음만은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다.
로봇이 감정을 흉내 내고, 가상 친구가 대화를 대신해도 ‘당신은 존재만으로 소중합니다’라는 시선
미래의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르고 효율적이고,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이 오히려 불편한 낙오처럼 취급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필요해질 것이다.
불완전함을 온기로 감싸는 사람,
실수를 정죄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시선,
“그럼에도 너는 괜찮다” 말해주는 마음.
새로운 기계, 고급형 로봇이 줄 수 없는 어떤 본질을 기억하고 싶다. 서로의 결을 느끼며, 다름을 인정하고, 존재 자체를 존귀하게 여기는 그런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맞이해도 여전히 ‘사람다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가끔은 얼마나 많은 ‘허구 위의 허상’으로 세상이 이루어져 있는가 싶다. 존재하지 않는 우위를 좇고, 실체 없는 성공에 매달리며, 결국은 남보다 앞섰다는 만족으로 내 존재 가치를 겨우 증명하는 그런 분위기말이다.
죽음을 앞둔 순간, 과연 어떤 것이 진짜 나를 지켜줄까 생각해 본다. 지금까지 모은 재산, 내가 고용한 휴먼로봇의 효율성, 혹은 정리정돈 잘된 삶의 이력서일까?
그렇다고 기술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당장 휴머노이드가 이동이 불편한 부모님 일상에 도움이 될까? 기대가 되는 면도 있다.
다만 그 로봇을 통해 우리는 진짜 ‘사람다움’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아니면, 그만큼 더 멀어지게 되는 건 아닐까?
고급형 로봇을 곁에 둔 사람만이
정서적 안정과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라면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정서 불평등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외로움을 채워주는 존재조차 ‘구매 가능한 것’이 된다면
‘사람 사이 관계’는 설 자리를 점점 잃게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나는 바란다.
효율이 전부가 아닌 세상,
사람이 사람을 여전히 기다려주는 세상,
다정함이 가성비가 아닌 ‘가치’로 인정받는 세상.
그 속에서 나도 여전히,
잘 만들어진 로봇보다
따뜻하게 머물러주는 한 사람이 되고 싶다.
서툴고 느릴지라도,
그 서투름 속에서
누군가의 하루에 다정한 존재로 남고 싶은 마음
어떤 날은 다정하지 않아도
또 다시 연결되고 다가갈 수 있는 마음
그 마음 하나만은,
어떤 기술도 대신해주지 못하지 않을까?
‘나라도 다정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