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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안에서 상담자로서의 태도를 돌아보다

상담자는 고통 앞에서 어떻게 있어야 할까


나는 혀에 생긴 조그만 돌기를 제거하는 시술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와 마취가 풀리자, 처음 느껴보는 통증… 생으로 아프다.

물 한 모금 넘기기도 힘들고, 목소리 내기도 겁났다.


혀 끝의 통증은 정말 정말 날카로움 그 자체였고

작은 상처이지만

그 고통 앞에서 너무나 무력해졌다.


이 고통 속에서도… 문득, 상담실에서 만난 여러 내담자의 얼굴을 떠오르는 밤을 보냈다.


말을 꺼내기도 주저하던 어떤 내담자

자신의 고통이 너무 오래되고 복잡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는 내담자


“제가 이상한 걸까요?”

“왜 이 일에서 아직도 못 벗어나는 걸까요?”

“그냥… 계속 발버둥 치는 것 같아요.”


그들의 그 말들이,

오늘따라 더 온몸으로 마음에 와닿는다.


내가 나의 작은 고통 속에서도 그들을 떠올려 보는 건 상담사의 백 마디 말보다 중요한 것이 ‘이해하려는 마음’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담사로서 내가 자주 느끼는 건 누군가의 고통을 ‘다 안다’는 말보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요”라는 마음의 전달이 훨씬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거다.


대부분의 마음의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말로 설명되지 않으며,
그저 막막하고, 오래도록 지속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고통은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어릴 적 겪었던 일, 반복되는 관계의 패턴, 알 수 없는 불안과 우울…


이걸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 내는 사람보다

“그냥 힘들다” 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분석을 하거나 누구 탓을 하거나

혹은 정답을 찾거나가 아니라

‘오직 그 마음 곁에 있기’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감히 가늠할 수도 없거니와 그것보다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은 생각보다 훨씬 큰 치유가 된다는 걸 나 역시 경험했기에 그렇다.


상담실에서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제가 이렇게 느끼는 게 그럴 수 있다는 말, 처음 들어봤어요.”

그 말이 나오면 나는 안다. 이미 마음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사람은 누구나, 내 마음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있을 때 비로소 스스로를 들여다볼 용기가 생긴다. 나 역시 상담사가 되기 위해 수련과정을 거치며 현재도 수차례 경험한 바이다. 그건 말로 다 설명될 수 없는 경험이다.


그 시작은 바로

“당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고 싶어요”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요”라는 태도에서 온다.


많은 내담자들이 자기 자신을 ‘약하고, 망가진 사람’처럼 여긴다. 나는 아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상담자들은 다르게 본다. 그들은 계속 살아보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포기하지 않고 도움을 찾는 사람들, 관계 속에서 다시 한번 마음을 열어보려는 사람들.


그 애씀은 때론 눈에 띄지 않지만 매우 존엄하다.


오늘 나의 입안 통증은 금세 나을 거다.

이 며칠도 나의 신경은 온통 혀끝에 있다.


누군가의 마음 안에 오래된 통증은 어떠할까?

그러니 훨씬 더 깊고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나의 작은 고통의 시간으로 말미암아말을 잇기 어려워하는 그 마음 앞에서 상담자로서의 나의 태도를 다시 점검해 본다.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진심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말이 그에게 닿는 순간을 기다려 본다.


그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나의 내담자들을 이해하기 위한 글을 써볼 것이다.


P.S. 많이 아플 거라고, ‘아팠죠?, 고생했죠?’라고 알아주신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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