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소설 01
내일은 오랜만에 가는 방콕 비행이다. 지난번에 갔을 때는 그냥 혼자서 끼니만 때우고 호텔방에서 한국 예능만 보다 왔던 것 같다. 친구들은 놀러 가서 좋겠다고 부러워하지만 일단 가면 피곤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밤샘 비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뭐든지 하기가 부담스럽다. 처음 부기장으로 임명되어 비행 다닐 때나 좀 낮에 돌아다녔지 이제 벌써 3년 차가 된 지금은 그냥 쉬고 싶은 마음 밖에는 없다. 하지만 오랜만에 가서 그런지 이번에는 뭔가 다른 것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기장님하고 식사라도 같이 할까 생각해 본다.
응? 누구지? 스케줄표의 이름과 사번을 봐서는 한 번도 비행을 같이 하지 못한 분인 것 같은데 왠지 이름이 들어본 것 같다. 아! 생각해 보니 지난 CRM 교육 시간에 강사로 열정적인 강의를 하셨던 기장님이다! S대학교 대학원에서 심리학 석사학위를 딴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본인을 소개하신 것이 기억났다. 그때 분위기로 봐서는 이번 비행은 편안한 마음으로 임하면 될 것 같은데 마지막에 비행교관을 하셨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교관을 하셨던 분들은 보통 질문을 많이 하시고 스탠더드가 높아서 지적을 당하기도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예전에는 동기들에게 카톡을 보내서 같이 비행하게 될 기장님이 어떤 분인지 싫어하는 게 없는지 특이한 절차가 있는지 묻곤 했었다. 그날의 비행 분위기를 좋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비행을 하고 나니 그것도 귀찮아졌다. 선입견을 갖고 비행하기도 싫거니와 이젠 어떤 분과 만나던 임기응변으로 맞춰서 할 수 있다. 카멜레온이 된 것이다.
사실 카멜레온이 되었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잘 맞지 않는 기장님을 만날 때면 힘들 때가 있다. 그리고 실수라도 하면은 호되게 혼내거나 자꾸만 질문하는 기장님을 만나면 괴로울 때가 있다. 부기장으로 근무한지 이제 3년이 다 되어가서 비행하는 데는 익숙해졌지만 기장님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하고 가끔씩 나오는 실수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늘 고민해왔다.
“오빠는 나사가 한 개 빠진 것 같아. 조종사가 그렇게 덜렁 돼서야 되겠어?”
“집에서나 그러지 회사에선 안 그래……”
10만 원짜리 과태료 통지서가 왔는데 내가 실수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장애인 주차 구역에 주차를 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럴 수 있었는지 상상도 안되지만 아무튼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회사에서는 안 그런다고 발끈했지만 요즘 매너리즘에 빠져서 그런지 공부도 안 하고 일하면서 자잘하게 실수하는 일이 많아진 듯하다. 남들이 말하는 실려 다니는 부기장이 된 것 같다.
혹시 CRM 강사이신 이 기장님에게 뭔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방콕까지는 5시간 반 정도 걸리니까 en-route에서 슬쩍 질문을 던져볼까 생각해 봤다.
갈 때 PF를 할 수도 있으니 지난번에 갔다 왔다가 기록해 놓은 자료를 다시 한번 보고 노탐(NOTAM)도 한 번 열어본다. 알람을 맞춰놓고 자기 전에 혹시 모르니까 전에 CRM 수업 시간 때 다운로드했던 파워포인트 자료를 훑어보았다. 아 이런 내용도 있었구나. CRM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그런데 내용이 너무 많다. 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