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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이 되지 않은 달걀의 꿈

화분 위에 놓인 달걀 껍질을 보며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탐구하다

by 김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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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좋아 옥상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쪽에 작은 식물이 놓여있었다. 화분이라고 말하기에 조금 투박한, 재활용된 페트병에서 자라는 식물. 그러나 정말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이파리에 가려 수줍게 머리를 내밀고 있는 달걀이었다. 어떤 용도인가 하고 물으니 달걀 껍질을 흙 위에 두면 식물에게 영양분을 공급해준다고 한다.



내가 아는 달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본다.



달걀은 태어나기 위해 세상에 나온다. 혹은 누군가에게 먹어지기 위해 세상에 나온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일 년에 한 번, 부활절이라는 특별한 날이 찾아올 때면 그려지기 위해 삶아지기도 하고, 때때로 생으로 피부에 얹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화분 위에 달걀이라니 (정확히는 달걀 껍질이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출현이었다.


옥상에 올라 테이블을 펼치고 나란히 앉아 회색빛깔 건물 너머로 멀리 보이는 푸른 하늘, 유난히 형태가 아름다운 뭉게구름을 반찬삼아 김밥을 먹는다.


우리는 서로의 꿈을 이야기한다. 엄마와 아이가 행복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성이 ‘엄마’라는 역할을 맡으며 치르는 희생을 탐구한다. 어느덧 ‘엄마’라는 단어는 준비하지 않았지만 차려진, 젓가락이 제일 많이 향하는 반찬이 된다.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는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는 계속된다.



내가 아는 엄마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엄마는 사랑으로 아이를 낳고 키운다. 집안일을 한다. 엄마는 집 밖에서도 일을 한다. 우리는 ‘엄마’라는 이름이 짊어진 수많은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모성’이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 청춘을 살아가는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아이를 낳지 않지만 나는 엄마입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 외에, 한 아이, 혹은 여러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일하며 다른 방식으로 ‘엄마’가 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우리는 출산이나 결혼에만 뿌리를 둔 것이 아닌 모성에 이르는 다양한 길에 대해 고민하며, 모든 아이, 심지어 많은 아이에게 사랑, 보살핌을 제공함으로써 어떻게 ‘어머니’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한다.



다시 페트병 속에 수줍게 숨어있던 달걀을 생각한다.



이 계란은 부화하지도,

품고 있던 노른자와 흰자도 떠나가

더 이상 프라이가 되지도 못하겠지만

그럼 뭐 어떠한가.

풀잎의 따스한 포옹 속에서

평화를 찾고,

그 따뜻함에 천천히 녹아내린 뒤,

흙으로 다시 태어나 흙에게, 식물에게, 어쩌면

쭈그려진 페트병에게도 기쁨을 줄지 모르는 것을.

그러한 달걀의 삶 또한 응원하는 것이다.



저녁은 현미죽을 해 먹기로 했다.

계란 두 개를 깨뜨려 팔팔 끓는 냄비 속에 터뜨린다.

껍질은 보통 가장 가까운 싱크대로 향하지만,

오늘은 왠지 이들을 깨끗이 씻어 이름을 지어준 뒤

안방에 있는 스킨답서스 화분 흙 위에 얹어 두고 싶다.



그리고 천천히 흙과 하나가 되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응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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