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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있어 참, 감사하다

행복한 내 인생을 위해 필요한 것들

by 김바리
• 오늘의 글감 : 행복한 내 인생을 위해 필요한 것들



몇 달 전, 조카에게 피아노를 선물했다. 이후에 언니집에 갈 때마다 피아노 연주를 하곤 한다.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둘째 조카가 방에서 나와 내 옆자리에 앉는다. 우리는 서로 왼손과 오른손을 주고받으며 곡을 연주한다. 내가 연주를 마치고 나면, 그도 자기가 최근에 배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얼마 전엔 피노키오 연주곡을 함께 쳐봤는데, 정말 기분이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노래를 하고 조카는 연주를 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이런 날들이 더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건강, 나와 함께 눈을 뜨고 감는 두 마리의 고양이, 아침 명상 후 느끼는 차분한 기분, 매일 몰입할 수 있는 일,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휴식을 취하는 것, 친구와의 친밀한 대화, 흐린 하늘에서 갑자기 마주한 따스한 햇살, 초록으로 가득한 자연,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나의 환경. 떠올리다 보니 셀 수없이 많은 것이 내 행복을 이루는 것 같다. 한편,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에는 또 다른 감정이 함께 공존했는데 그것은 바로 ‘감사’였다.


감사와 행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주로 내가 감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나아가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감사’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것이 어쩌면 내 행복을 위한 우선순위 1순위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오랫동안 나는, 감사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아니,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나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련을 마주했을 때 아픔이 더 컸다. 내가 겪는 이 고통이, 이 불행이 내가 자초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문명>에서 주인공의 비서인 앵무새 샹폴리옹은 이런 말을 한다.


우리한테 벌어지는 모든 일은 결국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 불행 역시 우리의 진화를 위한 촉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니 가끔은 불행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



내가 언제 어떻게 내게 벌어지는 불행까지 감사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최근 몇 년 간 나를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으로 읽었던 이야기와 만났던 사람들과 겪었던 경험들이 ‘무조건적 감사’에 대한 습관을 만들도록 부추긴 것만은 사실이다. 어쩌면 이것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자구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신형철 작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행복은 우리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그 모든 시간의 이름이거나, 혹은 내가 불행해진 뒤에, 불행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뒤늦게 얻는 이름이라고 말한다. 나는 내 불행을 잊기 위해 필사적으로 감사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빈 노트 두 장을 매일 채우며 오늘의 감사한 일을 세 가지씩 적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할 땐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을 감사하는 명상을 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할 땐 무작정 신발끈을 고쳐 메고 가까운 공원을 달렸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나의 무의식이 의식을 불행이라는 단어로 잠식하기 전에 잽싸게 나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에 감사하게 되었다.


해야 할 일보다 먼저 내가 하고 싶은 일로 하루를 시작하기, 이것을 누릴 수 있는 시간과 환경에 감사하기. 내가 해낸 작은 노력들과 그것이 만들어 낸 작은 성취에 감사하기. 행복한 내 인생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나의 이 감사한 마음의 뿌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지내오다, 2018년 7월, 한 칼럼을 읽게 되었다. 김경 칼럼니스트의 <자살불능자의 건강법>이라는, 제목부터 매우 자극적이고 읽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기사였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이 칼럼이 나의 시선을 붙잡았던 이유는 바로 그녀의 하루키식 소확행 예찬에 있었다.



처음엔 낯설었고 그다음에는 놀랐다.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소소한 행위인가 싶어서. 그러곤 진정 부러웠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런 사소한 것들을 발견하여 새삼 의미를 부여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하루키의 그 출중한 능력이…. 그런데 진정 다행이다. 사람들이 말하듯 부러우면 지는 게 아니다. 동경하는 순간 닮기 마련이다. 다행히 20년 전에 하루키 에세이를 끼고 살던 내게도 하루키의 소확행적 감수성이 전이됐고 그 이후로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삶의 구석구석을 예찬하는 ‘자살불능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하루키를 동경하는 것이었다. 작가라는 소명의식을 위해 철저히 절제된 삶을 살아가는 그의 삶을 동경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소한 것에서 출발해 의미를 부여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하루키의 능력을 동경했다. 그리고 그가 공개한 범위 안에서의 삶의 방식을 나는 그대로 따르려 노력해 왔던 것이다. 하루키의 작품을 통해 나는 ‘감사’라는 것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묘사된 작은 행복, 그것이 나의 일상에서도 발견되는 순간들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털끝만큼 닮을 순 없을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의 행복은 누구에게 큰 빚을 졌나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가족 다음으로 (살아계신 분들 중에서) 하루키를 언급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문득, 하루키 선생님이 돌아가시게 된다면 그 상실감의 크기는 얼마큼일까 하고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더 이상 그가 만든 소소한 행복의 흔적을 덧댈 수 없게 되는 그날이 퍽 두렵게 느껴졌다. 이전에도 나의 바람을 다른 글에서 표현했지만, 오늘도 이 말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하루키 선생님, 올해도 작품 내주셔서 감사해요.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게 다작해 주세요.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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