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8.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선 나를 잘 돌봐야 함을

나쁜 기억을 지우려다 좋은 추억까지 지워져 버린 슬픔에 대하여

by 김바리

줄리아 카메론의 책 <아티스트웨이>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삶의 질은 기쁨을 맛보는 능력과 비례하며, 기쁨을 맛보는 능력은 관심에서 시작된다'라고, ‘관심을 쏟으면 헤어진 연인, 아픈 아이, 깨진 꿈 등으로 인한 일상적인 고통이 치유되기 시작한다'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삶의 고통이 깊을수록 현재에 집중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학교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주 놀라곤 한다. “그런 일이 있었어?”라는 말이 자주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호들갑을 떨며 했던 썸남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이라든지, 친구와의 여행 중에 있었던 에피소드라든지. 그럴 때면 기억력이 좋은 친구는 당시의 상황을 사실에 입각하여 ‘정확하게’ 원인과 결과를 디테일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에 가끔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창피한 일들까지 되새기게 되곤 한다. 한 번은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려 하니 친구가 말했다. “너는 네가 관심 없는 일은 기억을 잘 못하는구나.”


이런 기억의 결핍은 대학 시절만이 아니라 최근의 경험에도 해당된다. 특히 누군가와 함께 한 일을 회상할 때 불과 몇 달 전이었음에도 같이 갔던 장소, 먹었던 것, 했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혼자 한 경험보다 누군가와 함께한 경험에서 이 나쁜 기억력에 대한 자각은 훨씬 더 자주 일어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순간 그 경험에 집중하기보다 그 공간에서 함께 하는 사람의 기분에 더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이런 성향 때문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다는 정보는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상대방의 기분이 좋고 나쁨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함께 한 시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소위 말하는 ‘배터리를 다 썼다'며 비슷한 만큼의 시간을 투자하여 침대에 누워 그날의 이벤트가 그리 즐겁지 않았다는 생각에 자주 빠지는 점이다.


한편 단순히 사람들과 함께 한 이벤트를 잊어버리는 기억 나쁨이라면 괜찮겠지만 (서운하다면 죄송합니다), 이것이 일과 연결되는 순간들이 많아지면서 고민의 크기가 차츰 더 커져갔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과거의 겪은 경험, 보고 들은 것들로부터 얻은 영감의 힘을 빌려야 하는 일이 많은데, 전에 봤던 영화에서 인상 깊던 그 장면이 좀체 떠오르지 않거나 심지어는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의 제목과 작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었던 순간들도 있다. 이를 자각한 순간부터는 의식적으로 어제 일어난 주요 이벤트를 기록하는 ‘어제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가끔씩 기록을 들춰보며 ‘이런 데를 갔구나', ‘이런 걸 느꼈구나' 하며 잊히기 쉬운 기억들을 한 번 더 반추해 보게 되었다 (‘어제일기'는 <문장수집> 이유미 작가님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한 것이다).


기억력에 대한 나의 깊은 고민은 언니와의 한 대화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우리는 맥주잔을 앞에 두고 기억력이 나쁜 이유에 대해 깊이 이야기를 나누었다(언니도 나만큼 기억력이 좋지 않다). 긴 대화 끝에 우리는 과거의 나쁜 일들, 부모님의 싸움이나 아버지의 주사와 같은 일들로 인해 우울해지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지웠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어느새 습관처럼 변해버려 좋은 기억마저 지워버리는 부작용이 생겨버렸다고 말이다. 약간의 자기 합리화스러운 결론이었지만, 이 대화를 통해 나는 내가 기억하는 작은 사건들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얻었다.


나의 나쁜 기억력은 어쩌면 다가올 미래를 불안해하고 과거의 일을 후회하느라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현재에 집중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스스로 호기심이 많다 말하여 이것저것 들여다 보고 발을 담그곤 했지만 사실 내가 진심을 다해 그 순간순간에 관심을 기울였는가 하면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내 기억력이 배의 닻처럼, 항해하기 위해선 언제 펼쳐야 하고 언제 접어야 할지를 알아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세찬 바람이 몰아칠 때조차 계속해서 닻을 펼쳐두는 것은 닻의 수명뿐만 아니라 배의 다른 부품들과 그곳에 함께 탑승한 사람들에게까지도 부담을 줄 수 있다. 아마도 나는 끊임없는 여정 속에서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너무 미래의 가능성과 과거의 실패들에 집중하다 보니 현실 속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기억은 과거의 행동의 단순한 잔재가 아니라 현재의 감정과 관심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휴식은 단순히 몸의 회복을 넘어 마음의 안정과 함께 기억력 향상에도 큰 도움을 준다. 휴식을 취한 후에야 기억은 더욱 또렷하게 되돌아온다.


나는 자주 회고하며 내 기억 속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지금 만들고 있는 이야기들에도 중점을 두어야 함을 깨달았다. 기억은 삶의 깊이와 풍요를 나타내는 지표다. 그 지표를 통해, 나는 내 삶의 각 순간을 더욱 선명하게 그려나가며, 그 속에서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 나 스스로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휴식을 제대로 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노력함으로써, 나의 모든 기억들이 —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순간들까지 — 선명하고 소중하게 남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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