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과 나의 정체성을 더 잘 이해한다는 것
인생의 순간들은 내가 그것을 이해하기도 전에 종종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나의 경우 성별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그러했다. 엄마의 한 마디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남자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자아이였어.” 이런 말은 겉으로는 사소해 보이지만 깊은 사회적 기대를 내포하고 있다. 네 명의 딸 중 막내로 태어났던 나의 어린 시절 사진 속에는 짧은 머리, 오버롤, 운동화를 착용한 모습만이 담겨있다. 돌아다니며 공을 차는 모습, 낚시하는 모습, 그것이 전형적인 여자 아이의 이미지를 거스르는 모습이었다.
이런 경험들은 나에게 청소년기 동안 소외감을 주었고, 이러한 감정은 성인이 되어도 계속되었다. 초·중학생 시절, 내 여성성을 지우며 스포츠 선수로 살았던 나는,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여성상과 내가 되고 싶은 여성상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다. 이 갈등은 마치 무한히 갈라지는 강물 앞에서 길을 선택해야 하는 나를 보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압박은 미디어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된다. 최근에 본 "Barbie"라는 영화에서 ‘Gloria’라는 캐릭터는 바비 인형이 여성성에 어떠한 인식을 주는지를 부각한다. 사실,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의 80% 이상이 미디어에서 제시하는 여성상에 압박을 느꼈다고 답변했다. 그녀는 여성이 사회에서 마주하는 모순된 기준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날씬해야 하지만 그런 의도를 표현하면 안 되고, 어머니로서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지만 직장에서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되며, 남성의 나쁜 행동을 지적하면 불평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고 말이다. 이러한 충돌하는 기대치들에 의해 나는 지치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너무 빠르게 도망치려 했을지도 모른다. 사회의 기대로부터, 그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여성의 정체성에서도 멀어져 갔다. 학교 시절에도 주변에는 여성들만 있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자리를 잃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에서 원하는 사람만 들이고,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막아버리는 방벽을 세워왔다.
이 모든 것이 나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편견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 보고, 듣고, 경험하고, 느끼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은가. 문제는 내가 그러한 경험들만을 추구하게 되자, 내 작은 세계의 벽이 점점 더 두꺼워졌다는 것이다.
내 진짜 자아를 찾기 위해선, 이 알에서 나와서 넓은 세계로 모험을 떠나야 했다. 그래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다양한 문화에 몸을 담가 보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다름’은 더욱 부각되었고, 나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다. 이제 나는 내 여성성 때문이 아닌, 내 국적 때문에 ‘이방인’이 되었다.
나는 외로움 속에서 책을 통해 위안과 인생의 지침을 찾으려 했다. 나폴레온 힐의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가 되어라"를 읽고 나서, 성장과 성공은 결국 마인드셋의 결과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 관점, 관계, 그리고 일에 대한 태도가 우리의 현실을 정의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다.
“아티스트웨이”의 줄리아 카메론은 성장은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가끔, 혹은 자주 멈춰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과정 자체가 나의 여정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단계, 모든 역경을 거치며 보호막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든 순간은 내 여정에 필수적이다. 진정한 탐험이란 이러한 여정 동안 스스로의 복잡한 우주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에 있다. 첫 비행을 준비하는 알 속 병아리처럼, 나는 내가 속한 공간의 아름다움과 잠재력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 모든 기대와 압박 속에서도 나는 나다. 그 어떤 레이블이나 박스에 나를 가두려 하더라도, 나는 나만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