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톨레, ≪이 순간의 나≫ 속 한 단락
인간관계가 행복이 아닌 깨달음을 위한 것임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인간관계에서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찾아올 더 높은 차원의 의식 수준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 에크하르트 톨레, ≪이 순간의 나≫ (센시오, 2019)
믿기지 않는다. 끊임없이 사랑을 주고 기대를 하고 상처를 받고 수치심을 느꼈던 그 감정의 원인이 바로 ‘구원'에 있었다는 것을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랑해야 한다, 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의에 거절을 당할까 봐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한 적이 많았다. 의기소침했다. 소심했다. 나의 제안에 대한 거절이 나에 대한 거절이라고 여겼다. 상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무심코 그런 사고 흐름에 사로잡히곤 했다.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걷기보다 외롭더라도 홀로 걸어가는 게 낫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혼자가 더 나아.” 다칠까 봐 두려워 두꺼운 갑옷을 걸치고 내뱉는 변명이었다.
회복탄력성. 점점 더 불확실해지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건강한 사회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질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이것. 소위 ‘맷집'을 기른다고 해석할 수 있는 말. 하지만 시련을 빨리 회복하고 도전하는 용기를 갖는다는 이 관점이 정말 건강한 것일까. 에크하르트 톨레의 ≪이 순간의 나≫ 는 답이 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질문을 바꿔보게 하는 책이었다.
삶의 무의미함,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구원의 대상으로 봐왔던 나의 과거를 돌이켜 본다. 열지 않은 상대의 마음의 문을 멋대로 열어달라고 두드리곤 했다. 그리곤 나 혼자 상처받고 나 혼자 결론짓고 관계에서 떠나곤 했다. 그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을 슬픔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환멸'도 섞여있었을지도 모른다. 자꾸만 혼자가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다.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고. 몰입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한다'는 말이 사실은 맞지 않는 말이라고. 구원 또한 비슷하다. 인간관계의 목적이 구원이 아니라 ‘깨달음'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감정들에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가끔은, 그 과정에서 구원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는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니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더 아껴줄 필요가 있다. 더 돌봐줄 필요가 있다. 분석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에 기쁨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고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끼는지 스스로를 더 관찰하라는 의미이다. 나의 에고가 뿜어내는 그 에너지를 바라보며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더 잘 들어줘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내게 가장 낯선 타자는 나일지도 모른다. 나의 결핍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메꾸려고 하기보다 한 발 떨어져 나의 결핍의 모양과 그것이 싹을 틔운 토지를 잘 관찰하고 더 튼튼하고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돌봐줘야 한다. 그래야만이 나도, 내가 뿌리내린 땅도, 나에게 놀러 오는 나비들도, 나의 향기를 맡는 이들도 함께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관점과 의견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살펴보세요. 당신이 맞고 상대방이 틀렸다는 고집의 이면에 있는 정신적, 감정적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그것이 바로 에고의 마음이 뿜어내는 에너지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 충분히 느끼면서 그것을 의식하세요. (...)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지켜보겠다고 결심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내맡김입니다.
- 에크하르트 톨레, ≪이 순간의 나≫ (센시오, 2019), 17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