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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를 만들고 행복해졌다

마이클 싱어, ≪상처받지 않는 영혼≫ (세계사, 2014) 속 한 단락

by 김바리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면 에너지 흐름에 어떤 변화를 감지할 때마다 힘을 빼고 그 뒤로 물러나라. 그것과 맞싸우지 마라. 그것을 바꿔놓으려고 애쓰지도 말고 그것을 심판하지도 마라. (...) 그 모든 것을 놓아 보내야 한다.

- 마이클 싱어, ≪상처받지 않는 영혼≫ (세계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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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감정의 길잡이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오늘은 관계의 길잡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아주 어렸을 적 또렷한 기억 하나가 있다. 홀로 엄마를 기다리며 거실에 걸려있던 열두 제자 그림을 올려다보던 장면. 울면서 엄마가 어서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었던 순간. 한참 지나 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오시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애착이라고 표현을 하면 좋을까.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건강하고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 나는 누군가를 애착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엄마를, 친구를, 연인을 열렬히 애정했다. 어떠한 이유로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애착의 틈이 생기는 것을 잘 견디지 못했다. 그때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지 못하고 회피하거나 혹은 다른 감정의 형태, 예를 들면 분노, 웃음과 같은 것으로 가리려 했다.


나의 감정이, 생각이, 행동이 곧 나라고 믿었기에 관계 속에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실수를 할 때면 나라는 사람에 대한 자존감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내 이름 석자, 나 ‘김미진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분석한 나를 정의 내리곤 했다. 이것은 아직 친밀하지 않은 관계 안에서 나를 빠르게 소개하는 하나의 방법이자, 내가 미리 만들어두는 보이지 않는 방어막과도 같았다.


문제는 과거의 경험으로 쌓아 올린 나의 세계에서는 누군가를 알아가고 정을 주고 사랑을 주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긍정적인 기억보다 부정적인 기억이 머릿속에 더 오래 남아 누군가의 순수한 호의를 자꾸만 의심하게 되고, ‘이럴 것이다’라고 먼저 결론 내리게 되는 흐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어 사고를 멈춰보기도 하지만 때때로 나의 뇌는 내 마음대로 동작하지 않을 때가 있다.


어느 날, 인스타그램에서 이름을 바꿨다. 김바리. 탄생부터 30살 초반까지의 나라는 사람과 나를 둘러싼 관계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이름. 처음부터 그러한 의도로 바꾼 것은 아니다. 그저,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을 감명 깊게 읽었으며, 주인공 엠마에게 아주 큰 연민을 느꼈다. 그녀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프로방스 지방이 아니라 새로운 사고와 시도에 너그러운 세련된 도시에서 태어났다면 조금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감히, 그녀의 삶을 대신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반항적이고 일탈적인 성격으로 인해 수녀원에서 쫓겨났지만 21세기 도시 서울에서는 그것이 전위적이고 참신하고 새로운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성향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은가.


보바리 부인에 대한 연민과 동경심, 그런 비슷한 마음으로 내 부캐 이름을 ‘김바리'로 바꾸었고, 조직에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나를 드러낼 수 있었던 최근 1년 간, 어느 때보다 내 본명만큼 부캐의 이름이 익숙해졌다. 이 이름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나고, 글을 쓰며 지내는 것이 꽤 행복했다. 30여 년간 내가 가져왔던 나란 사람에 대한 정의를 잊고 새하얀 종이에 엠마 보바리라는 인물을 적어놓고 거기서부터 출발해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었다.


최근 8개월 간, 이 이름을 가지고 마음을 돌보는 책 모임을 나갔다. 거기서 만난 여러 책들은 나의 본캐의 삶을 반추해보게 해 주었다. 함께 읽었던 모든 책이 좋았지만 에크하르트 톨레의 <이 순간의 나>, 마이클 싱어의 <상처받지 않는 영혼> 은 특히나 감명 깊었다. 그들의 책을 읽고 관계란 구원이 아니라 깨달음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이는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임을 알게 되었으며,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고 지금, 여기, 현재를 충만하게 사는 가장 현명한 방법임을 깨우치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 부캐가 쌓아내고 있는 서사 덕분에 내 본캐가 행복해졌다. 어느샌가 깨달은 사실은, 김바리는 김미진이 해온, 하고 있는 좌충우돌 시련과 실패의 과정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그것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지 않고 다 이해해 주는 존재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나의 가장 가까운 관찰자, 이는 스스로 나의 가장 친밀한 구원자를 만들어낸 것에 다름이 아니다. 김바리라는 부캐를 만들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는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한 발 떨어져 조금 더 현재에 충실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날이 조금 더 행복해지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 관계의 길잡이가 필요하다면 당신의 부캐를 만드세요.

그리고 부캐의 삶을 살며 새롭게 발견한 것에 대해 글을 쓰세요.

자신의 본캐를 더욱더 사랑하게 되는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 삶의 흐름을 편안하게 맞이하려면 당신의 가슴과 마음은 현실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활짝 열리고 넓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저항하기 때문이다. 저항을 멈추기를 배우라. 그러면 스트레스를 주는 문제처럼 보였던 것이 영적 여행의 징검다리처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 마이클 싱어, ≪상처받지 않는 영혼≫ (세계사, 2014), 2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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