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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카즈에게 빚을 지고 싶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지수 옮김,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중

by 김바리
이 도시에서 영화를 개봉해 관객이 많이 와주면 그건 물론 저의 수입(이익)으로 이어지고, 이윽고 조금이라도 ‘국익'으로 이어지겠지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지수 옮김,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바다출판사, 2021)



잠깐 한눈을 팔면 하는 일에 숫자를 매기려고 든다. ‘6 개월 후에 200개의 판매', ‘1주일 후에 1천 회의 조회수'와 같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그린다.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이 결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이왕이면 긍정적인) 그 결과가 눈에 그려져 그로부터 역으로 돌아온 지금의 시간이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견딜 힘을 얻기 위해서일까.


욕심이 나는 만큼, 결과를 생각한다.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있는 동료와 점심을 먹으며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를 이야기했다. 그녀는 만들어진 결과물에 대한 것은 우리의 손을 떠난 일이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담백하게 말했다. 아차, 과정에서의 즐거움, 몰입의 기쁨,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 현재임에도 나는 무심코 결과를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할 때 장면을 상상하기 어려울 때면 쉽게 구체적인 숫자로 그것을 대신하려고 한다. 내가 그리는 미래가 함께 하는 사람의 미래와 같은 언어로 충분히 공유되고 있지 않다는 (내 안의 믿음 혹은) 생각 때문일까. ‘당신과 나는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까?’라는 것에 대한 동의를 얻고자 하는 수단, 그런 것이 결과를 상상하는 나의 태도에 녹아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 본다.


최근에 시작한 프로젝트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 일은 나에게 자아실현 차원의 것을 넘어 이 일이 속한 영역이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의 한 축으로 인식되길 바라는 희망의 실현이기도 하다. ‘마음 챙김', ‘자기 이해', ‘심리'라는 단어와 짝을 이루는 것들은 대체로 ‘치료’, ‘케어', ‘돌봄'과 같은 건강과 관련한 인식이 있다. 이를 배움과 놀이, 일상에서 재미와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일련의 행동으로 끌어올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깊게 녹아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영화를 계속해서 만드는 이유,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할까. 누군가가 갖는 신념이나 가치관이 나의 미래의 모습과 닮았으면 하는 것은 누군가를 깊이 선망할 때 발현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겠지 (덕후의 마음이랄까요).


그는 그의 영화 <괴물>에 대해 “두 소년이 우리를 떠난 상태에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떤 것을 생각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갈 때, 그 사람의 일상을 보는 방식이 변하거나 일상을 비평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기를 언제나 바랍니다.”


감히 그의 단어를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라는 단어를 내가 만드는 콘텐츠로 치환해 본다. 영화라는 단어를 내가 마음을 쏟는 일과 프로젝트, 봉사활동으로 치환해 본다. 그렇게 했을 때 하나하나의 결과는, 목표는 더 이상 크게 중요하지 않아 진다. 내가 동경하고 있는 인물과 같은 비전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 그 현재진행형의 상태가 더욱더 중요해진다.


좋아하는 영어식 표현이 있다. ‘owe ~ to~’, 해석하자면 '~에게 ~한 빚을 지다, 신세를 지다'란 의미로 자신의 지금의 모습이 있기까지 도움을 얻은 사람에 대해 부드럽고 정중한 감사를 표현하는 마음이 녹아있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10대의 나는 작가 오히라 미쓰요에게, 20대의 나는 장 피에르 주네에게, 30대의 나는 하루키에게 감사한 빚을 졌다. 그리고 40대로 향해가는 요즘,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에게 큰 빚을 지고 싶다는 생각을 감히 하게 된다.


그가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처럼, 나 또한 내 일을 그와 같이 바라보고 싶다.



영화를 또 하나의 측면인 ‘문화'로 볼 경우,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건 ‘영화가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영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요컨대 ‘국익'이나 저의 이익보다 ‘영화의 이익'을 우선하는 가치관이죠. 이야말로 영화를 문화로 여기는 일입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지수 옮김,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바다출판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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