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비에리, ≪삶의 격≫ 중 한 단락
자아 존중의 측면에서 본 인간의 존엄성은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릴 줄 안다는 것과 관련을 가진다. 이 존엄성을 가진 사람의 행위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큰 이익을 가져온다고 해도 어떠한 경우에서도 하지 않는 일이 있다는 뜻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존중하기 위해 이 한계 안에서 머무른다. 만일 선을 넘으면 자아 존중감을 잃게 된다.
- 페터 비에리, ≪삶의 격≫ (은행나무, 2014)
책에서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만든 사례로 과학자 베른하르트 빈터의 이야기가 나온다. 병에 걸린 그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아내는 용하다는 기적 치료사를 소개한다. 그는 화를 낸다. 학문적 증명과 과학적 사고와 이성을 믿으며 살아온 그에게, 미신을 믿으라니. 아내는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 것을, 큰일 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라고 대꾸한다. 그러자 빈터는 ‘내 안에서 큰일이 일어났어!’라 말한다. 이는 자아 존중 유지를 결정짓는 한계선이 타인이 아니라 당사자가 스스로 긋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여행지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렸었다. 다음날의 일정, 갈 곳을 알아보기 위해 일행의 핸드폰을 더 많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한참을 휴대폰을 살피다 방문 이력에서 극우 커뮤니티 주소를 발견했다. 이름만 들어왔던 그곳에 실제로 접속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 사람이 내가 가장 자주 대화하는 상대 중 한 명이란 사실이 충격이었다. 이후에 왜 그곳에 드나드는지, 새로운 소식을 접하기 위해서라면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 등 다른 대안이 없는 건지, 재미를 원한다고 해서 꼭 그러한 형태로 소비해야 하는 건지 화도 내보고 설득도 해보고 울어도 보았지만, ‘보기만 했어', ‘이제는 안 할게'라는 메마른 대답만이 돌아왔다.
책을 읽고 나니 당시의 나의 대처 방법이 잘못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의 한 부분이 나의 정체성의 한계를 뒤흔들 정도로 큰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작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포기하거나 아니면 그 세계로부터 분리되었어야 했지 않았나, 하고 말이다. 그러기에 나는 마음이 약했고, 사랑하는 마음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라는 순수함이 남아 있었고, 부족함이 많았으며, 우리에겐 현실적인 문제들이 얼기설기 복잡하게 뭉쳐 있었다. 결국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서로의 세계에 선을 또렷하게 여러 번 긋고 나서야 이별을 인정하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내 기준에서 옳든 그르든, 상대는 타인이다. 연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그들은 오랜 기간 구축해 온 그들만의 자아상이 존재한다.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할수록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조언'이라는 포장지에 감싸 원하지 않는 선물을 건네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된다. ‘여전히 나는 내 사고를 강요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하고 말이다.
철학자 애덤스미스는 ‘세상에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차이는 크지 않다고’ 말했다 한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상대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옳지 않다고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과거의 행동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옳음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는 것,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이 세상에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 (특히 타인의 생각), 특히 바꾸기 어려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 가고 있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상대의 생각을 바꾸기를 포기하는 것?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내가 가진 그림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그려 건네보는 것. 상대의 마음에 심상을 불려 일으켜 공감적 상상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 내가 신은 신발을 신고 싶어 하진 않더라도 어떻게 생겼나 보기라도 하게 하는 것, 맘에 든다면 기꺼이 신어보도록 한 쪽을 벗어 건네는 것, 그 정도의 노력이 내가 정한 내 자아상의 한계선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상대가 내 신발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면, 그 또한 그의 자아상의 일부이고 나의 자아를 해치기 위함은 아니니 (대체로는) 상처받지 않을 것. 내 자아상과 상대의 자아상의 한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대화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환 편, 자기 계발서에서나 동기부여 연설가들의 말에서는 보통 ‘성공하기 위해 나를 한계 짓지 말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여기서는 한계 짓기가 나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게 흥미로웠다. 어떻게 보면 나를 존중하기 위해 내 자아상은 한계 짓되, 내가 하는 도전에 대한 가능성은 한계 짓지 말자는 뭐 아이러니 같은… 것인가. 한계를 짓지 말아야 더 ‘큰 나’를 만날 수 있는 건데 또 나와 타인을 존중하려면 한계를 지어야 하고.
과연 무엇이 자아 존중감을 지키는 일일까? 애초에 자아 존중감은 항상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잃었다가 다시 얻는 순간, 더 확장된 자아, 더 큰 나를 얻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당사자가 결정할 일이다. 흠, 어렵다. 나의 한계는 열어두되, 다른 사람의 한계는 (그 사람이 지어놓은 자아상의 집이 있다면) 그것을 ‘내가' 고치려 하거나 허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로 지금은 이해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