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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리 Mar 22. 2024

기술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료≫ (청미래, 2011) 중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무신론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종교가 유용하고, 흥미롭고,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때때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전제이다.

- 알랭 드 보통, 박중서 옮김 ≪무신론자를 위한 종료≫ (청미래, 2011)




나는 불가지론자와 유신론자의 사이에 있다. 신의 존재가 있다고 믿지만 어느 한 신을 특정해서 그 종교를 믿어야겠다는 고집은 없다. 구체적으로 그려보진 않았으나, 내가 만든 나만의 신이 나와 함께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 신은 내가 사회에서 꿋꿋이 버텨내는 데 도움을 준다. 지금의 고통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지만 결국 더 큰 선(善)이 세상에 있다고, 그것을 믿고 따르라고 격려해 주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모든 일이 실용적 관점에서 도움이 되느냐 아닌가로 해석이 되느냐 하면 또 그런 것은 아니기에, 때로 조금 더 자연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의 고민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것은 예를 들면 나는 왜 태어났는가, 왜 사는가 같은 존재론적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이 고통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고민까지 다양하다. 이런 복잡한 삶의 물음이 따라올 때는 시중에 나와있는 자기 계발서, 전문 교양서 등의 목차를 들춰보는 것 만으로는 답을 얻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이런저런 시도를 아무리 해봐도 ‘운' 탓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을 때, 인과관계로 따져봐도, 눈앞에 보이는 실체적인 감각으로 해석하려 해도 영 탐탁지 않았을 때, 이런 순간을 한 번, 두 번  더 자주 마주하면서는 영적, 종교적 지혜를 조금씩 살펴보게 되었다.


우리는 종교가 우리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발명품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두 가지 필요성–세속 사회에서는 어떤 특별한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두 가지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겼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첫째는 몸속에 깊이 뿌리 박힌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필요성이다. 둘째는 직업상의 실패, 꼬인 인간관계, 가족의 죽음, 자신의 노화와 사망 등에 대한 우리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끔찍한 고통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다. 

- 알랭 드 보통, 박중서 옮김 ≪무신론자를 위한 종료≫ (청미래, 2011)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필요성에 크게 공감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가 나를 종교적 지혜의 문을 두드리게 했다.  공동체 안에서 도덕과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 그리고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찾아오는 시련과 고통을 대처하는 것, 이것들은 심리학, 철학, 과학 등 세속적인 학문이 어느 정도 그 역할을 해주고 있지만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할 때가 분명, 있다.


작가는 우리가 종교에 굴복하거나 혹은 종교를 모독하는,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을 버리고 나면 종교가 가진 갖가지 정교한 개념들의 저장고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세속적 생활의 가장 끈질기고도 대책이 없는 질환들 가운데 몇 가지를 완화시키는 일에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 이야기를 읽고 기술이 발달해도 줄어들지 않는, 오히려 더 증가하고 있는 질환 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오늘날 우리는 신체적으로는 과거보다 더 건강해졌지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더 윤택 해졌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의료와 기술의 발달로 수명은 늘어나고 신체적 매력도 쉽게 확보할 수 있지만 외로움, 우울증, 중독은 늘어나고 누군가를 잃는 상실의 아픔, 실패에 대한 상처 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기술의 발달로, 세속 사회의 교육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런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무신론자가 직면하게 된 도전이란, 어떻게 하면 종교의 관념과 의식을 종교 제도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의 가장 훌륭한 요소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작 그리스도의 탄생이야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즉 크리스마스는 공동체와 축제와 갱생이라는 테마와 관계가 있는데, 이런 테마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던 이전의 몇 세기보다도 훨씬 더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박중서 옮김 ≪무신론자를 위한 종료≫ (청미래, 2011)



19세기 유럽에서 종교적 믿음이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사람들이 의미를 찾고, 자신을 이해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같은 인간을 용서하고, 각자의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스러운 질문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이때 영향력 있는 세력의 답변은 문화 예술 작품이 성서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세속적이건 종교적이건 궁극적으로 교육의 목적은 우리의 시간을 절약하고 오류를 방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종교는, 문화의 교육은 던지지 못하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직접 질문을 던진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가?’, ‘ 나는 얼마나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이 말이다.


교정(矯正: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에 대한 아이디어는 예수의 탄생보다 더 먼저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어떻게 하면 지식을 이용하여 내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을지에 관해서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다. 이 전통은 특정 종파의 것이 아닌 공통의 유산 가운데 일부였다고 말이다. 


한 개인이 세계를 경험하고 관념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 문화의 교육 (고등교육)이냐 종교의 의식이냐에 따라 무엇이 좋고 나쁘다로 간주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다양한 종교 종파가 주창하는 공통의 지혜, 그 지혜가 존재했던 조금 오래전 역사(그리스, 로마 철학)에 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아의 요구 대신에 우리의 호흡에 온 정신을 집중할 경우, 자아는 의식에 대한 주장 가운데 일부를 포기하기 시작하고, 따라서 평시에는 자아가 걸러내 버렸을 데이터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 알랭 드 보통, 박중서 옮김 ≪무신론자를 위한 종료≫ (청미래,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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