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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리 Mar 20. 2024

나는 왜 고통스러운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현대지성, 2018) 중

다른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살피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이 불행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자신의 정신의 움직임들을 주의 깊게 잘 살피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지게 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박문재 옮김 ≪명상록≫ (현대지성, 2018)



살면서 내가 내리는 의사결정마다 원하는 내 모습과 실제 내 모습이 일치하지 않을 때 고통스럽다고 느낀다. 제로 웨이스트의 중요성을 외치는 피드에 좋아요를 누르고선 카페에서 쉽게 플라스틱 용기에 테이크아웃을 한다든지, 모든 인간은 다 자신의 삶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들의 행동을 그 사람의 정체성인양 판단해 버린다든지, 일을 하는 이유가 공동체에 헌신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면서도 나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연봉을 받는 것을 알게 되면 시기심을 느낀다.


이런 내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단지 내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그 화살이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뭔가를 조치했다면 더 나은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 ‘나는 왜 또 생각과 행동을 다르게 하고 있는 걸까'하는 자책감,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한 나의 생각의 역사를 더 잘 살펴보지 않고 그저 그런 부정적 감정을 느낀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기만 했다.


내가 아쉬워하는 더 나은 삶의 그림은 대체로 타인의 삶을 보는 것에서 비롯된다. 세상에는 내가 그려보지 못 한 것을 그려보게 해주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면 드라마, 영화, 예능, SNS에 올라오는 다양한 이야기, 다리 건너 들려오는 누군가의 경험담과 같이 말이다.


철학자 알랭드 보통은 우리가 영국 여왕에게서 질투를 느끼지는 않는다고, 대체로 여러 조건이 비슷한 사람에게서 질투심을 느낀다고 이야기했다. 외부 세계의 자극을 대하며 내가 그들과 비슷하지 않은 이유가 내 생각과 행동이 달라서라고 개인의 문제라고만 치부해 오다가는, 언젠가부터는 그들과 나의 조건이 다르다는 식으로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게 과연 좋은 걸까? 결국 매번 외부 자극을 맞닥뜨릴 때마다 ‘나의 문제다'에서 ‘나와 그들은 출발선이 다르다'로 이어지는 고정적인 생각의 회로가 내게 도움이 되는 걸까?


고통과 불안의 시기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막막할 때마다 나는 ‘스토아 철학'*을 떠올렸다.  이것의 영향을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지혜를 얻어보자


그동안 신들이 네게 무수히 많은 기회들을 주었는데도, 너는 그 기회를 단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고,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일들을 미루어 왔었는지를 기억해 보라. 하지만 이제는 네가 속해 있는 우주가 어떤 것이고, 그 우주의 어떤 지배자가 너를 이 땅에 보내어 태어나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이 땅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엄격하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네가 그 시간을 활용해서 네 정신을 뒤덮고 있는 안개를 걷어내어 청명하게 하지 않는다면, 기회는 지나가 버리고 너 자신도 죽어 없어져서, 다시는 그런 기회가 네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박문재 옮김 ≪명상록≫ (현대지성, 201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저작 <명상록>의 일차적인 목적은 그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생각들을 살펴보고,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를 자기 자신에게 충고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최고가 아니라 최선의 삶, 나는 어쩌면 최선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의 최고의 일부분을 훔쳐보면서 나도 그곳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 읽은 <에밀>에서 장 자크 루소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는 인간이 강하고 약한 것은 자신이 지닌 힘과 욕망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가진 힘에 비해 욕구가 크면 클수록 유약해진다고, 강해지고 싶다면 욕망을 줄이라고 말이다.


머리로는 알겠지만, 욕망을 줄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바깥 세계는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할 것을 부추긴다. 원하는 것이 없는 삶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올바르지 않은 태도처럼 느껴진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자 하는 내재된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러한 성향은 제대로 발전하는 경우 가족과 공동체에 진심으로 헌신하고, 모든 사람들을 우주라는 거대한 국가의 동일한 시민들, 또는 형제들로 여기고서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표현된다.


내가 바라는 나의 본성은 이와 같다. 건강하고 가족과 화목하고, 물질적 풍요로움이 있어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주어지는 것도 좋지만, 그것들이 나의 행복을 결정짓지만은 않는다. 나는 더 배고프다. 내가 필요한 건 명성인가? 하면 그것도 일부는 맞다고 본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이 나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 나의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 그런 것들이 형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런 기회를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마음도 몸도 가난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가난해질 때 이 마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계속해서 이 부분에서 도전을 받아왔다. 작게는 봉사활동 (커뮤니티 활동을 먹고사는 일 때문에 포기할 까 고민하는 것 등) , 크게는 개인의 성취 (예를 들면 진로 중도 포기와 같은)까지.


여유가 있어야 남을 도울 수 있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게 제일 편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종종 하니까.


내가 처한 상황을 ‘~이러니까 그래'로 단정 짓고 놓아버리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도록 ‘~인 조건을 만들어야 해'라는, 활동의 방향으로 나를 데려다 놓고 싶다. 그래서 이런 미래의 내가 덜 고통스러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찾은 방법은 이렇다. 첫 번째는 정신의 평안을 위해 내 '몸'이 조금 더 고통스러우면 된다는 것. 예를 들면, 퇴근 후에 한, 두 시간을 더 할애해서라도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 또 다른 방법은 일상에서 작은 고통을 일부러 만들어서 웬만한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내면의 근육을 다지는 것이다. 낯선 사람에게 거절을 당해본다든가, 평소 불편했던 사람과 함께 일을 해본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과정에서 견딜 수 있는 고통의 기준은 타인이 아닌 나만이 정할 수 있다. 그러니 계속 경험하고 나의 고통의 리스트를 만들고 인내하고 내려놓을 시점을 잘, 알아봐 주면 되는 것이다. 남은 것은 시행착오뿐이다!



*스토아 철학 : 스토아주의는 인내심, 자제력, 현실주의 등을 강조하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적 평온을 유지하고 외부의 충격에 강한 정신적 탄력성을 개발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우주적인 이치에 따른 순응과 인내심을 통해 내적 평온과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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