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러브레터

바스러질 듯한 시간의 끝에서

by 김상원

어느 날 노년기에 접어든 분이 상담센터에 찾아오셨다. 일평생 성실히 일하며 커리어를 쌓고, 은퇴를 맞으신 분이었다. 사회적 직업적 역할을 다 한 후에, 이제 개인적 삶을 영위할 시기를 맞으신 것이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뜻하지 않게 외면해왔던 과거의 상처가 못 견디게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말문을 여시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아주 오랜 시간 꽁꽁 싸매어 두었다가 실타래를 풀려고 하니 막막하게 느껴지셨을까?


가능한 대로 편하게 말씀하시도록 안내를 드렸고, 이 분은 용기를 내어 오래전 아픈 과거를 떠올리셨다. 정말 힘든 일들을 겪어 오셨음을 알 수 있었다.


역할과 의무에 몰두하고 이를 지나치게 나 자신과 동일시할 때, 우리는 마음을 돌볼 틈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마음의 괴로움이나 문제를 외면하기 위해 더욱더 역할에 집착하게도 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다 보면, 아니러니 하게도 우리는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살아는 있지만, 어느샌가 영혼은 생기를 잃어가고 마음은 건조해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 분을 생각하며, 문득 바스러질 듯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 시간의 끝에는 어떤 선택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부디 새로운 시작, 살아있음의 기쁨과 행복으로 나아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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