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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돌봄 Oct 02. 2023

일단 저지르기

#1. 가족 독서 모임의 시작

우리도 가족 독서 모임 해보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살살 여러 번 툭 던지듯 한 말에 오케이 사인을 했다.

'해봐요' '그럽시다'

우리 집 남자들의 동의를 받아낸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그리 쉽지만은 않다.




첫 번째, 과연 몇 번의 독서 모임을 할 것인가.

2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매주 한 번.

호기롭게도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을 제안했다.

해보고 아니면 바꾸면 된다라면서.


두 번째, 과연 요일과 시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일요일 밤의 어영부영한 시간을 알기 때문에 일요일 저녁을 제안했다.

어설프게 저녁을 먹고 빠트린 과제는 없나 살펴보거나

괜히 코미디 프로 하나 보려다가

이 밤의 끝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시간.

차라리 그 시간에 책모임이라도 하는 게 낫다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일요일은 싫다면서 토요일 밤을 제안했는데

한 번씩 가족 행사로 모일 때 주로 토요일에 모이기 때문에

반대표가 하나 나왔다.

그럼 일단 일요일 저녁으로 당첨.


세 번째, 독서 모임을 하기로 했으니 이름이 있으면 좋겠어서

서로 후보 이름을 말하고 투표로 뽑기로 했다.

'백가네 독서모임'은 뭔가 느낌이 없다.

결론적으로 난 백 씨가 아니다. 너네만 백가네다.

F.B.I라고 얘기하길래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Family Book Institution  이란다.

도대체가 단어만 갖다 붙이면 되냐고 쏘아붙였더니

나더러 정해보란다.

사실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래서 일단 '가족독서모임'으로 하고, 차차 생각하기로 했다.


네 번째, 과연 어떤 책으로 할 것인가.

내 머릿속에선 아이들과 읽고 싶은 책, 엄밀히 말하면 읽히고 싶은 책 리스트가 음흉하게 떠올랐다.

큰 아이는 셜록 홈스 시리즈.

둘째는 나니아 연대기를 스토리를 다르게 해서 읽어보자고 했다.

결국 만국의 전통 있는 방법인 가위, 바위, 보를 통해서 결정을 냈다.

남편이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어서 첫 번째 책을 정하기로 한 것이다.

대망의 가족 독서 모임의 책은 바로, 바로 '파이돈'이었다.

롱롱 타임 어고우, 서양 철학을 읽겠다며 고이 모셔놓은 책인데

남편은 벌써 두 번이나 읽었다고 했다.

살짝 걱정이 되긴 했다.

하지만 어렵다, 쉽다 난이도를 굳이 정하고 말할 필요는 없으니

읽어보기로 했다.




큰 아이의 중간고사가 끝나고, 명절 행사까지 잘 치른 일요일 저녁.

드디어 첫 번째 가족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끝까지 읽긴 했으나, 영혼이 가출한 상태에서 읽은 나.

벌써 세 번째 회독으로 나름의 가치관을 정립한 남편.

그리고 100페이지 읽은 첫째와

나름 80퍼센트는 읽은 둘째까지 식탁에 모였다.




문예출판사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각자의 느낌을 먼저 이야기했다.


"음, 저는 너무 재미가 없었고, 도대체 죽기 직전에 왜 이렇게 질문을 많이 하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첫째의 말이다.


"전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좀 읽고 읽어서 재밌는 건 아니지만 좀 기억나는 부분은 있었어요. 그런데 머릿속에선 딴생각을 하면서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책 같아요." 요건 둘째.


"난 다 읽었는데, 그냥 후루룩 읽을 책이 아니라 사색을 하면서 읽어야 할 책인 것 같아요." 이것은 나의 말.




영혼과 신체, 죽음과 삶, 정의, 지혜로움과 무절제 등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물론 책 속에서.

둘째가 나름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스토리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야기했다.

큰 아이는 학원을 다녀온 직후여서 그런지 눈빛은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간 듯했다.

소크라테스에게 질문을 하는 케베스와 심미아스의 대화를 읽으며 그래도 이 책은 한 번 읽고 끝날 책은 아니군 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인 것만은 아니야. 군인이기도 했어. 그것도 아주 훌륭한 군인. 당시엔 철학자들이 정치인이면서 연예인이면서 군인이었지. 수학자이기도 했고. 소크라테스 몸을 보렴. 나이는 들었지만 몸이 근육이 잘 자리 잡고 있고 탄탄한 거 보이지?"



남편은 아는 선에서 열심히 대화를 이끌려고 했고, 그래도 우리 넷이 이렇게 모여 있으니 조금이라도 대화를 할 수 있는 매개체가 생긴 기분이었다.

다음 책 선정자는 누구냐 하고 찾다가 2주 후에 책도 같은 책 속에서 읽기로 했다.

50페이지 정도 분량의 '크리톤'으로 정했다.

막상 진행을 해보니 늘 새로운 책을 읽는 것보다 한 책을 천천히 읽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수저>라는 책으로 학생들과 슬로리딩을  어느 일본의 선생님처럼 말이다.


긴 시간의 독서 모임은 아니었지만, '거지같이 시작하자'가 나의 모토인지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이돈'이라는 책을 함께 읽으려고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찮았다.

다 읽으면 읽은 대로 덜 읽었으면 그런대로 상관없었다.

함께 한다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다만 부모 주도적인 시간이 아닌 가족이 다 함께 주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희한하게도 가족 독서 모임은, 처음 해보기도 했지만 쉽진 않았다.

개인적인 독서 모임에선 2주에 한 번씩 책을 읽거나,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데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결의 모임이었다.





뒤죽박죽 가족 독서 모임이었지만

함께 테이블에 앉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한 방울씩만 떨어져도 언젠가는 욕조를 가득 채우고 흘러 너무 칠 거다.

그렇게 이야기 하나하나 적립하다 보면 가족 독서 모임의 향방도 잡혀가겠지.

서로 의견을 묻고 조율해 가는 과정 속에서도 서로 배려를 배울 것이다.

아니, 무엇을 배우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만 힘을 빼고 아이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아야겠다.

많이 들어주고 싶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터무니없을수록 상상 속 이야기일수록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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