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에 대한 소고
'해원이 소리 내어 <<집에 있는 부엉이>>의 한 장면을 읽어주었다. 승호는 무릎담요를 덮고 군밤이에게 비스듬히 기대앉아 듣고 있었다. 아이가 여러 번 읽은 책을 또 골라 온 걸 보면, 어른이나 아이나 마음이 힘들 때 반복해서 읽고 싶은 책이 진짜 '인생 책'이 아닐까 싶었다. 지금 읽는 대목은 <눈물차>라는 짧은 이야기였다. 주인공 부엉이는 슬픈 생각을 떠올리며 흘린 눈물을 찻주전자에 모아 따뜻한 눈물차를 끓여 마시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슬픔이 조금 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이도우 소설
오랜만에 소설책을 읽다가 작가의 맑은 문체에 빠져들었다.
글 속의 인물들이 좋았고, 스펙터클하지 않아서 편안했다.
문득 위의 대목에서 책 한 권이 생각났다.
열 살 무렵인가.
외갓집을 토요일에 갈 때면 책장 한편에 꽂혀 있던 책을 반복해서 읽곤 했다.
<<거인의 정원>>과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주황색과 초록색의 책 표지는 늘 설레게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어른들이 이야기하시는 틈에 책을 꺼냈다.
늘 같은 책이었지만 항상 읽었다.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생겼다.
슬프다고 하기엔 표현이 너무 짙고, 재밌다고 말하기엔 가벼운 느낌.
감정의 중간 어디선가 평소에 몰랐던 마음을 꺼내주는 듯한 감각에 연례행사처럼
외갓집에서 그 책만 읽었다.
특히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그 시절 다른 책과는 다른 너무나 독특한 책이었다.
나무는 왜 하염없이 주기만 했을까.
소년이 점점 어른이 되고, 노년기에 접어들 때까지 말 그대로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나무를 보며 열 살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자는 나무를 부모님의 사랑에 비유하기도 하고, 자기 몸을 갉아가며 주기만 하는 나무를 바보 같다고도 한다.
그(나무)는 바보가 아니다.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나무는 소년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적시적소에 주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자신의 선택이니 후회가 있어 보이지도, 미련이 남아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
외부의 개입 없이 오롯이 선택한 나의 인생이 나무에게 만족감을 준 것이다.
세상 속의 어느 인물들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책임감 있는 존재, 그것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런 나무의 모습 때문에 이 책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능력 범위에서 타인을 도와줄 수 있는 마음.
사랑하는 존재를 지킬 수 있는 나만의 무기.
충만해진 본인의 마음까지.
끌려다니지 않은 한평생을 보낸 나무는 다 드러난 밑동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된 소년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인생 책이라는 것은 한 책이 영원할 수도 있고, 나이나 시기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나 하나 보태지 않아도 이미 좋은 책을 많고, 늘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 세상 속에서 인생 책이 한 권이면 어떻고, 여러 권이면 어떠랴.
수시로 바뀌어도 괜찮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될 수 있다면.
지금의 나이에 바라본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바보나 희생자가 아니다.
누구보다 삶에 행복한 멋진 존재다.
넉넉한 존재다.
요즘의 나는 '눈물차'가 필요하다.
눈물차에 슬픔을 넣어서 마셔 없애버리기 위해서이다.
차를 다 마시고 나면 기쁨차를 마셔야겠다.
나에겐 어울리는 건 기쁨이지 어둠이 아니니까.
다시 외갓집 서가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는다면, 이젠 멜랑꼴리한 감정은 지우고
'나무, 좀 멋진데.'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