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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돌봄 May 21. 2023

할머니와 함께 춤을

신박한 욕 한 번 들어보실래요?

6학년이었던 때는 'JAM'이라는 그룹이 인기였는데 친한 친구들과 방과 후 모여 그들의 춤을 추곤 했다.

반장이란 이유로 해야 하는 장기자랑.

장기랄께 없으니 생성할 수밖에.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몸놀림으로 친구들과 음악을 틀어놓고 연습하던 시절.

춤이란 게 나름 재미도 있고 스트레스도 풀리고 

이러다 연예인 되는 거 아니냐며 친구들과 되지도 않을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집에서도 연신 음악을 틀어놓고 춤 연습을 했었는데

바쁜 부모님 대신 관객은 늘 할머니셨다.



" 할머니 봐봐요. 이번에 소풍 가서 출 춤이야."
"할머니, 이건 지금 유행하는 춤"
"염병 댄쓰 핑하네. 정신 사납다잉. 밥이나 먹어"


할머니 덕택에 다양한 말들을 듣고 살긴 했는데, 이야. 이번 욕은 정말 신박했다.

흡사 이것은 진정한 욕미넴의 시작 아니면 언어의 연금술사?

도시락을 싸서 다녀야 했던 국민학교 시절이라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주셨던 할머니.

부모님과는 주말 가족(?)으로 잠시 지냈었는데, 덕분에 도시락 싸기는 할머니 차지셨다.

어떤 날은 손녀가 좋아하는 감자볶음이 듬뿍.

다른 날은 분홍 소시지에 계란말이가 한가득.

종갓집 큰 며느리셨던 할머니는 손이 크신 분이셨는데, 언제나 음식을 하시면 윗집, 옆집까지 나눠주실 정도로 음식을 많이 하셨다.

이는 도시락 반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구들과 점심시간이면 삼삼오오 도시락을 들고 모여서 행복한 얼굴로 서로의 반찬을 나누곤 했었는데, 

단연코 할머니의 도시락 반찬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 최고였다.

항상 많이 맛있게 챙겨주셨던 반찬.

점심을 먹고 나면 다시 춤 연습에 돌입했다.

소풍 장기 자랑도 그렇지만 친구들과 춤을 추면서 나름의 희열을 느꼈던 듯하다.

지금이야 몸치에 박자 감각 다 읽은 박치이지만

13살 어릴 때는 잘 추든 못 추든 몸이 말을 듣던 시절이니 유행하는 춤은 다 한 번씩 춰보면서 점심시간을 보내곤 했다.


대망의 소풍날, 당시 유행하던 화가 선생님 스타일의 빵모자를 쓰고

친구들과 동선을 맞춰가면서 춤을 추던 시간.

화려한 조명이나 스포트라이트는 없지만

춤추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열심히 염병 댄쓰 핑하던 순간이 떠오르면

자연스레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이 난다.


멀쩡한 밥 먹고 지랄(?)한다며 쳐다보시지만 누구보다 춤추는 손녀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시던 할머니.

이유 모를 사춘기 감정으로 하루 종일 방바닥을 구르면서 울 때에도 시끄럽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만히 기다려주시던 할머니.

한 번씩 손을 잡고 뱅글뱅글 돌면 어지럽다면서 욕을 더 날리시던 할머니.


가끔 조카가 걸그룹 춤을 출 때면 티브이 화면 다 가린다며 타박을 놓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어쩔 수가 없다. 이 맛에 딸을 키우나도 싶다.

나를 바라보시던 할머니도 이런 기분이셨을까 감히 대입해 본다.

이제 춤을 춘다고 흐뭇하게 바라봐줄 할머니는 안 계시지만 

조건 없이 받았던 그 사랑 덕분에 

현생을 잘 버텨나가고 있는 것 같다.


살면서 자존감이 무너지는 일도 있고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인생살이에서 나름의 힘듬은 누구나 존재할 거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무한정 사랑받고 돌봄을 받았던 그 경험이

다시 한번 힘을 내게끔 지탱해 준다.


이런 경험이 없다면?

방법은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주면 된다.

물론 그 누군가의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이 0순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타인에게라도 한없는 사랑과 믿음을 굳건히 줘본 경험은

결국 도돌이표처럼 자신에게 돌아올 것임을 믿는다.

시작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맹목적인 사랑이 아닌 따스한 시선 하나면 충분하다.


아이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줄 수 있기를.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한 믿음을 줄 수 있기를. 

할머니 앞에서 다시는 춤을 출 순 없겠지만 

소중한 기억이 힘이 있음을 알기에 이렇게 추억해 본다.


인생의 항해를 시작하는 '모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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