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관에 다녀온 썰 풉니다

by 마음돌봄

작년 겨울 어느 토요일 오전 5명의 여인이 차를 대동해 향한 곳은 담양의 어느 관상 점집이었다.

깔끔한 외관, 전원주택의 편안함과 주인의 보살핌이 잘 드러나는 고즈넉한 곳이었는데 관상 점집이라는 말만 없었으면 여느 가정집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아니 나는 안 간다니까. 그런 걸 믿질 않아요.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는 거지."

"진짜 괜찮대요. 신점 아니고 관상으로 보는 거 신기하잖아요. 가봐요, 진아 선생님도 서울에서 오고 그랬는데."

"알겠어요, 서울에서까지 가고 싶어서 오는 데 같이 가십시다. 그런데 난 거실에서 기다릴게요. 일 좀 하고 있으려고요. 선생님들 점 보는 동안."


서울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진아 선생님이 알아본 곳이라니,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담양까지 가자고 하나 싶어서 흔쾌히 나섰다. 서울, 세종시, 광주, 화순. 다양한 곳에서 모인 우리들은 영어 교사를 위한 온라인 수업에서 만난 인연들이다. 벌써 햇수로 5년째 되는 인연들. 처음 학원을 개할 때 잘 나가는 원장님한테 비결 듣겠다며 새벽 기차를 타고 의정부까지 가던 사이가 아니던가. 그래, 갑시다. 사람 한 명당 한 시간 정도를 너끈히 상담해 주던 점집 사장님은 꽤 성의가 있는 모양새였다. 한 명 한 명 상담을 하다 보니 벌써 오전 시간이 다 지나고 점심 식사를 예약한 식당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정말 점 안 봐도 되세요? 가족들 것까지 물어보시지, 신년인데."

"괜찮아요. 다음에 가죠. 뭐."


유명한 죽통 정식집으로 향하며 다들 신기하다고 좋았다고 속이 후련하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난 타로점 정도는 재미로 생각하고 보는 편이지만 신점은 왠지 무서운 느낌이고(굿을 하는 분들이니까)

관상 점은 처음 들어서 신기하긴 했으나 그다지 끌리진 않았다. 열정 넘치던 20대에는 특히 더 그랬다. 내 운명 내가 개척하는 거고, 운명 따위 다 이겨주겠다 하고 외치며 살던 내가, 초긍정의 힘으로 나름 나름의 역경을 이겨온 내가 점이라니, 오 아. 관심은 살짝 있으면서 그렇다고 마음을 다 주고 싶진 않은 봄 처녀의 마음이랄까. 그랬던 내가.


지난주에 친한 선생님에게 추천받은 철학관을 다녀왔다.

음양과 오행을 설명하는 곳으로 깔끔한 실내. 네이버 예약도 빠르고 블로그 리뷰도 정갈한 곳이었다.

점사를 본다기보다 철학을 하는 분위기랄까. 그래서 이름도 철학관인가 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2년 남은 큰 아이의 입시, 나를 철학관으로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다.

고맙다. 아들아, 아들 덕분에 이렇게 혼자서 철학관 가는구나.

역시 육아를 통해 인간은 성장하며, 자식 생각을 하면 못 할 것이 없나 보다.


이래 봬도 동생 부부는 전도사 부부고 친정 부모님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그 누구에게도 행방을 발설하지 않고 다녀왔다. 혹자는 남편하고 가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운명인지 필연인지 남편은 마침 출장 중이었다. 이번 주 내내 붙잡고 있던 <보바리 부인>을 던져놓고, 단톡방에 올라온 전화로 예약 전화를 걸었다.


"1월 3일에나 예약 가능하신데요. 앗, 마침 토요일 오전 9시 30분 비었네요."


아, 동시성의 법칙. 운명의 데스티니.

가야 하는 운명이로구나. 약간은 설레는 가슴으로 인스타를 유유히 서핑하는데 점 보러 갈 때 물어볼 사항이 피드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역시 위대한 알고리즘이여. 개인 맞춤 알고리즘은 인류의 불필요한 시간을 단축 주는 보물이자 나의 감시자. 영화 <아가씨> 속 대사처럼 어쩌면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철학관에 가면 지켜야 할 것.
1. 생년월일, 태어난 시각 등 정보를 준 이후에는 질문하지 말고 기다릴 것.
2. 철학관 사장님이 풀어주는 말에 귀 기울일 것(입이 말하고 싶어 움찔움찔해도 그 입 다물라)
3. A4에 적어주시긴 하지만 웬만하면 녹음할 것(음성 녹음도 있는데 난 왜 사용을 못 하니)
4. 말하는 중간에 자꾸 끼어들면 말의 흐름이 바뀌어버린다.




내 사주풀이 5만 원, 아들 것은 3만 원(가족 추가는 3만 원이다)

아마 대부분의 철학관에서 생성된 금액일 것이다.

생각보다 잘생긴 사장님은(대체 이게 왜 눈에 띈 것인가) 운에 관한 책을 두 권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고, 다기에 차를 마시며 공부를 많이 하는 학자 분위기였다.


나에게 평생 선생님, 원장님 소리를 들어야 한다며 관이 있으니, 교사나 공무원 등 나라의 녹을 먹어야 한다는 말. 시대가 바뀌니 지금은 과거 시험에 급제해서 이름을 드높이는 세상은 아니나 여하튼 나는 학자 상이라는 것이다. 어쩐지 요즘 자꾸 대학원이 당기더라니, 이분도 대학원을 이야기하면서 그쪽으로 이야기하신다. 글재주가 없는 것은 아니나 순수 문예 창작보다는 독서 교육이, 돈을 생각하면 피부 아로마 쪽 강사가 좋다는. 중간에 피부관리실도 운영 중이라는 이야기는 괜히 했나, 말의 흐름을 방해한 것인가. 오조 오억까지 생각이 머리를 맴돌면서 지금이라도 임용 준비를 해야 하나(이 나이에 연금 못 받는 거 아니야?), 아들 한국사 공부할 때 같이해서 공무원 준비를 할이런 생각들이 스치다가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글만 쓰고 가르치고 사시오. 소리를 들으니, 그래 요즘 전업 작가가 흔하나. 어차피 한강 작가, 스티븐 킹, 김영하 작가 정도는 돼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며 뇌 속은 자진모리장단이 울린다.



"사장님, 전 번역 공부도 하고 싶은데요. 번역도 관심 있어요."

"피부미용 아로마 책 번역하셔요."


"사장님, 전 어떤 일을 해야 돈이 나올까요?"

"강사, 지금 하시잖아요. 그거 좋습니다. 피부 쪽에 돈 있습니다."


그럼 대학원은 독서 교육이 아닌 향장학을 해야 하냐는 질문에 묵묵부답. 잠시 여백.


미술 재능이 있는 아들은 오히려 그쪽보다 의료 보건이 낫다 하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면 의대나 간호대를 보내라고 하는데 이 부분은 내가 봐도 너털웃음이 나온다, 물론 애는 참 착하다. 시간이 다 되었다며 사장님은 작별 인를 외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 마음을 다잡는다. 한 군데만 더 가보자. 유명한 곳을 한 곳 더 추천받았기 때문이다. 두 군데를 다녀와서 들은 내용의 교집합을 찾아보면 확률적으로 더 맞는 부분이 나올 거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이 예전보다는 조금 똑똑해진 것도 같고. 사장님이 알려주신 행운의 숫자와 색깔, 건강 부분을 곱씹어 보면 숫자나 색깔이야 뭐 그렇다 쳐도 심혈관과 시력을 조심하라니. 예이 하고 대답은 했는데 눈이야 뭐 노트북에 스마트폰을 보니 그렇고 심혈관도 뭐 우리나라 3대 중병 암, 뇌, 혈관 중 하나니까 당연히 조심해야 하고. 글 쓰는 재능은 있다고 했으니, 베스트셀러 작가의 꿈을 위해 미친 적 그냥 가봐도 되지 않을까 해석을 굉장히 주관적으로 해본다. 아직 가야 할 철학관이 더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기분이 업이 되면서 발걸음도 가벼웁게 알라딘중고서점으로 향했다. 가서 북 파우치를 살 생각이다. 긍정의 힘이 다시 샘솟는다. 분명하게 결론이 난 것은 없다. 그래도 뭐든 노력했으니 되었다, 안심해도 된다. 나에겐 다음 철학관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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