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국여인의 일기

by 마음돌봄

"짜잔, 그대 선물은 이거지."


커다란 트렁크에서 나온 선물은 연둣빛 양장표지에 분홍 장미꽃병 아래 담겨있는 홍차 한 잔이 눈에 띄는 책이었다. 2년 전 독서 모임 워크숍을 단골 책방에서 했었는데, 내가 준에게 받은 선물은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1930>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자칭타칭 영국 덕후인 나에게 딱 맞는 나이스 초이스. 영국이란 나라에 빠져든 것이 언제부터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멀고 먼 옛날인 1994년으로 추정된다. <스물다섯스물하나>라는 드라마에 등장한 이 전설의 작품 덕에 작가에 대한 꿈도, 영국이란 나라, 특히 옥스퍼드 대학이라는 로망도 생겨났는데 바로 대작가 '원수연'님의 <풀하우스>라는 만화다. 매달 연재되는 만화와 단행본을 얼마나 소중히 간직하고 아껴봤던지 주인공 엘리지의 영국 집과 옥스퍼드 대학 출신 작가라는 설정, 멋진 영화배우 라이더 베이까지 사춘기에 꽂혀 버린 어떤 썸띵은 한 사람의 인생에 깊이 각인되어 버렸다. 동인도 회사의 만행을 필두로 한 제국주의의 역사는 뒤로 한 채 오로지 <풀하우스>, '제인 오스틴', '앤 래드클리프'와 '브론테 자매', '찰스 디킨스'까지 영국 문학에 푹 빠져버린 나에겐 영국이란 나라는 하나의 꿈과 같은 그 무엇이 된 지 오래다.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시리즈는 총 네 편이다. 평범한 중산층 여성인 주인공 '영국 여인'이 <시간과 조수>라는 잡지에 소설가로 등단하면서 첫 번째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등단 이후, 런던의 문학계로, 작가로 초청되어 미국으로, 종국엔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국의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당시 영국의 생활 모습부터 시대상뿐만 아니라 위트 있고 현재 나 같은 엄마들이 느낄 수 있는 공감까지 놓치지 않는다. 간혹 <레이디 수잔>이나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같은 작품처럼 서간문으로 된 책은 읽어봤지만 일기로 이루어진 소설이라니, 마치 내 일기도 책이 될 수 있다는 가슴 뛰는 상상과 평범한 주부가 인기 있는 작가가 된다는 대단히 훌륭한 스토리가 가슴을 뛰게 했다. 얄미운 공주병 친구도 등장하고, 늘 내 아이는 남의 아이보다 부족한 것 같으며 남편이 좋은 면이 당연히 많지만 가끔은 정말 '남편'으로 느껴지는 상황까지 현대 사회와 어찌나 닮아있던지 내 글도 책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환상에 젖어 당장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책 출간을 한 소설가인 양 히죽히죽 댔다. 꿈이라는 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던가. 환상적이고 이룰 수 없을 것 같으면서 가슴을 뛰게 하는. 종국엔 긍정의 힘으로 반드시 해내겠다고 이를 악물고 도전하게 되는 것. 인생에서 한 번쯤은 꼭 이루고 싶은 것 아니겠는가.


더 놀라운 건 단순히 '영국 여인'이 작가가 된 그 사실뿐만이 아니다. 고전이 늘 그렇듯 우리가 사는 현시대와 지극히 닮아있다는 것이다.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세 번째, 런던에 가다>를 보면 국가의 위기가 닥치고 소득세와 절약에 관한 기막힌 발표들이 나온다는 구절이 있다. 국가의 위기는 현시대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 아닌가. 경제 대공황, 인플레이션, 한국의 외환위기 등등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모습이 마치 재방송해주는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심각한 경제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글 쓰는 일이 가정생활과 그에 따르는 여성의 의무에 방해하는 정도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메리 고모의 말을 보며 '영국 여인'뿐만 아니라 나 또한 이 글을 먼저 쓰느라 살포시 외면해 놓은 오늘 저녁 설거지거리가 눈에 살짝 보이나 식기세척기라는 위대한 문명의 산물을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왜 여성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에는 역할에 따르는 업무를 마감해 놓고라는 전제가 따르는 걸까 한참 생각하다 어쩌면 요즘 남자들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출산의 영역이야 자연의 힘을 거슬러 남성에게 위임할 수 없지만 현시대의 남자들도 여자들만큼이나 결혼이란 틀 속에 들어오면 희생하는 영역이라는 것이 생긴다. 제 아무리 라테파파, 테토녀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네 권에 걸친 영국 여인의 일기를 읽으며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먼 훗날 혹은 지금 당장이라도 누군가에겐 신선하면서도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삶의 모습이며 좋은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어쩌면 내가 매일 밤 쓰는 일기도 누군가에겐 그러하리라. 지극히 평범하지만 삶의 한 순간이라 의미 있는, 낄낄대며며 웃으면서 그래 이게 인생이다. 사람 사는 거 별거 없구나 느끼게 되는 그런 글. 마지막엔 손에 막 쥔 따뜻한 커피잔처럼 마음이 따스해지는. 매일 일기를 쓰며 하루를 돌아보고 마음을 챙기며 안정감을 느꼈는데, 나중엔 영국 여인의 일기처럼 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일기 쓰는 밤이 더욱더 기다려진다. 예쁜 일기장도 다시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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