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온도

by 마음돌봄

2001년 난생처음 생긴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어린 대학생에겐 신세계였다. 표를 끊고 무작정 들어가는 시스템에서 예약제 영화관이 처음 생긴 날, 친구들과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 PC통신의 전성기였던 시절, 지금으로 말하면 웹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연재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원작 소설을 본 나로서는 극장 개봉 후 보러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주인공 '그녀'는 첫사랑을 잃은 아픔을 간직한 채 아름다운 외모에 엽기적인 반전 성격으로 남주인공 '견우'와 엽기 발랄한 일상을 만들어가는데 로맨틱 영화인 <엽기적인 그녀>에는 '미래인'이라는 설정이 등장한다. 영국에 다녀오고 몇 년 후, 그녀는 죽은 남자친구의 엄마를 다시 만났고, 그 자리에서 우연히 견우와 재회한다. 견우는 바로 옛 남자친구의 사촌이었던 것이다. 그녀를 찾기 위해 영국에 가려 했던 견우는 그녀와 재회한 후 영국에 갈 이유가 사라졌다. 그때 그녀는 말한다.


"나 미래인 만난 것 같아. 너의 미래, 견우야."


둘은 처음부터 운명이었다는 서사가 완성되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운명이란 건 노력하는 사람에게 '우연'이라는 다리를 놓아준다는 견우의 마지막 대사와 함께.


이런 영화 같은 만남은 아니지만 가끔 그럼 미래인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책을 통해서. 남편과 나는 지극히 현대인이니 미래에서 온 운명일리는 없고 내가 만난 대부분의 미래는 대부분 책 속에 있었다. 책이 불타는 온도 화씨 451, 미국의 대문호 '레이 브래디버리'의 작품 <화씨 451>을 보면 소방수가 아니라 방화수(friefighter)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책을 읽는 것이 금기시되는 시대이다. 집에 책이 있거나 책을 읽는 '책사람'들이 있으면 어김없이 그 장소는 불에 타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주인공 몬태그는 방화수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시대에 몬태그의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는 만남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어디까지 내다본 것일까. 마치 요즘의 우리가 에어팟이나 이어폰을 끼고 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몬태그의 아내 밀드레드는 하루 종일 골무 모양의 라디오를 귀에 꽂고 있다. 고전을 읽어주고 요약해 주는 라디오, 좀 더 많은 그림과 영상이 들어간 짧은 텍스트와 쇼츠를 연상케 하는 표현들까지 작가는 향후 50년 후의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이미 이 책은 책을 불태운다는 사실부터 나를 전율시켰다. 그동안의 독서 라이프를 돌아보니 난 유독 책, 도서관, 서점이 나오는 소설을 좋아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연상시키는 작가의 방화수 설정은 고급 정보를 차단하고 말초적이고 직관적인 내용들만 일반 국민들에게 내려보내는 어떤 가상의 정부를 떠올리게도 한다. SF문학의 특징이랄까. 정말 일어날 것만 같은 일들의 향연 속에서 더욱더 책을 붙들고 있게 된다. 문지혁 작가의 <비블리온>도 책과 독서를 통제하는 세상이 배경이었고, 그 세상에서도 책을 후대까지 지키려는 '책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책이 어떤 종교라도 되는 양 붙들고 있게 되는 마력이 있는데 가끔은 읽지 않은 책에 눌리기도 하고, 읽지 않아도 책을 사는 것만으로도 기쁘기도 하다. 독서를 하는 사람의 모습은 이 두 가지일 것이다. 책상 위에 쌓여있는 책을 보면서 언제 다 읽나 싶기도 하지만 제목만 읽어도 독서야 하면서 나를 합리화시킨다. 도서관에 가면 한 권만 정말 딱 한 권만 빌려야지 다짐을 하지만 신간 코너에서 읽고 싶었던 책이 있는 걸 발견하면 여지없이 낑낑대며 대여섯 권을 순식간에 빌리고 만다. 이미 있는 책들이 있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도서관에 있는 책과 구독 서비스로 열람하는 책들을 보리라. 절대 사지 않으리라 작심을 해도 새 책이 주는 종이의 질감에 가끔, 아니 자주 굴복하고 시원하게 카드를 긁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느낀다. 작가의 통찰력과 필력에. 그럴 때마다 나는 놀란다, AI기술이 화두인 이 시대에 인문학을 강조하고 철학과 예술을 이야기한 작가의 말에. 이럴 때 다시 한번 내가 '책사람'임이 안심이 되고 자랑스럽다.


특히 책 속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작가의 말이다. '작가의 의도'라는 뻔한 답을 차치차고서라도 작가의 많은 생각과 비하인드 스토리가 들어있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모비딕>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는데 그는 문예창작과가 있는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아니었다. 대신 도서관에서 수천 권이 넘는 책을 읽으며 글쓰기를 공부했다고 한다. 학교 교육, 정치, 종교 등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걱정하고 도서관과 책의 힘을 믿고 있었다. 또한 글쓰기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런 부분이 내 마음에 와닿았는지도 모른다. 책을 사랑하고 도서관이 우리의 삶이자 중심이라고 말하는 사람. 문명의 시작과 끝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이 가슴 뛰는 포인트가 되었다. 작가의 말처럼 하루 일과를 꼬박꼬박 해나가면 주말, 월말, 연말에 내가 했던 모든 일들에 만족을 느낄 것이다. 여전히 책을 사랑하는 내가 마음의 온도가 항상 활활 탈 수 있도록 새기고 있는 말이다.





하루 일과를 꼬박꼬박 해 나간다면, 주말 월말, 그리고 연말에는 당신이 했던 모든 일들에 만족을 느낄 거라고 믿습니다. 그건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지 그릇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니 행동을 잘하면, 매일 글을 잘 쓰고, 잘 움직이면, 연말에는 스스로에게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 레이 브래드버리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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