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확장상을 받은 나

by 마음돌봄

얼마 전 대학 학과별 생기부 필독서를 출력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이 리스트는 전공별로 읽으면 좋은 생기부용 도서였다.

내심 아들의 진로를 생각하고 있던 터라 그 영역을 보다가 참새가 방앗간을 스쳐 지나갈 수 없는

문과 영역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심리학과, 특히 영문과 생기부용 책을 보니 죄다 내가 좋아하는 고전이 아니던가. <1984>, <제인 에어>, <멋진 신세계>, <폭풍의 언덕> 등등.


아이러니한 일이다. 영어를 좋아하지만 욕심껏 잘하지도 않고 많은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게 내 양심선언이다. 고전을 좋아하지만 가끔은 읽다가 던져버린 책도 있다. 관심사는 영어와 고전인데 한편으론 영 자신이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바로 어제 책을 한 권이라도 출간한 경험이 있는 작가라면 참여가능한 시상식에 참여했다. 샴페인 대신 남편이 먹던 맥주 한 잔을 탈취해 왔고, 드레스 대신 새하얀 꽈배기 카디건을 입었다. 내가 받은 상은 '언어확장상', 올해 영어 필사 책과 필사 전문서, 필사 앤솔로지를 출간한 덕분이다. 덕분에 언어라는 영역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언어'를 좋아했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똥을 누어봐야 한다고 말한 어느 작가의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동의했었다. 대학도 아니고 대학원을 한국외대 통역대학원을 가야겠다고 정할 정도로 환상에 빠져 살았다. 고등학교 때 IMF를 겪은 나는 일주일에 한 번 MBC에서 방송한 <성공시대>를 봤는데 어느 회차의 주인공이 국제회의통시통역사이지 교수님인 최정화 통역사였다. 프랑스어를 공부하던 유학 시절 이야기와 공부하는 모습에 반해버린 난 당장에 동시통역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고, 대학 목표도 한국외국어대학으로 정했다. 오호통재라. 소녀의 꿈과 실제 모습(성적)은 너무나도 괴리가 심하여 이루지 못하고 다른 대학 외국어대학으로 하향 지원해 대학생이 되었다. 사실 대학 이름보다 중요한 건 꿈에 대한 의지와 노력일 텐데 그렇게 하기엔 다소 나약한 인간이었다. 기어이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통역학원이라도 다녀보든지 악착같이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기엔 정신력이 약간 불에 탄 종이처럼 바스스하고 사라져 버렸다고나 할까. '제인 에어'처럼 굳건히 버티고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저택의 주인의 청혼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자존감이 높고 자기 주도적이었으면 좋을 텐데 결국 그런 의지는 제인, 그녀에게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엔 임종령 통역사의 <베테랑의 공부>를 읽으면서 삶에 대한 태도, 일에 대한 열정과 겸손함을 또 느끼며 그 옛날 꿈꾸었던 통역사의 꿈이 살아났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난 외향적 내향인이라는 것이다. 온갖 주접을 떨며 유머를 펼치지만 한편으론 낯선 곳이 어렵고 많이 쑥스러운 그런 사람. 막 떠오른 기가 막힌 농담(내 기준으로)을 말하려고 하다가 순간 멈칫하기도 하는, 그러다 결국엔 하고 싶은 말을 하고야 마는 사람. 가끔은 세상의 모든 단어를 다 알고 싶고, 체화하길 원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입을 다물고 고요히 있고 싶기도 하다. 시끄러운 언어, 침묵의 언어, 둘 다를 갖고 싶은 욕심쟁이일지도.


도서관이나 신문을 보다가 눈에 띈 책들을 보면 어김없이 느낌이 오는 작품들이 있다. 이건 대작이다. 엄청난 느낌이 몰려온다. 그런 책들은 어김없이 작가의 말이 감동적이거나 작가의 서사가 드라마틱하거나 '언어'가 중심인 책들이다. 지난주부터 읽기 시작한 <바벨>이란 책은 최근에 발견한 대작 중 하나다. 게다가 배경은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이건 절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책이다. 주인공들은 해리 포터 시리즈 인물들처럼 옥스퍼드에 모인 최고 레벨의 언어 능력자들, 번역가들이다. 영국의 제국주의와 옥스퍼드의 숨겨진 두뇌, 야욕, 다양한 언어의 향연이 펼쳐지는 그야말로 최신상 뷔페집과 같은 작품. 다양하지만 먹을 것 없는 그런 식당이 아니라 어쩜 이렇게 잘도 어울리게 버물렸나 싶을 정도의 작품. 역시나 언어가 중심이며, 각 챕터의 시작엔 내용에 맞는 작가들의 책 속 문구가 가득하다.


어쩔 수 없이 난 언어형 인간이다.

동시통역보다는 번역에 관심이 더 많고, 내향적인 성향에 더 안성맞춤이다 생각하는 그런 사람.

뛰어난 언어 능력을 갖고 싶고, 사용하고 싶지만 능력이 거기까지 안 되는 욕망의 전차.

그런 내가'언어확장상'을 받은 것은 언어에 대한 나의 사랑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실력을 떠나 분명한 건

이미 나란 사람은 언어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는 것이다.

말이나 단어, 문장, 구의 모음집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머릿속에 펼쳐져 있다.

좋은 문장을 수집해 늘 필사 노트에 적고, 떠오르는 순간의 생각들을 아이디어 노트에 옮겨 본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아무 필사책이나 펼쳐서 천천히 적어본다.

결국 말이란 것은, 언어라는 이름은 이렇게 삶 곳곳에 물들어있다.

언어를 사랑하는 나에게 나르시시스트처럼 취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앞으로도 절대 놓지 않을 생각이다.

난 '언어확장상'을 받은 작가니까.

계속 언어의 바닷속에 빠져 있고 싶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활자의 세계 속으로 계속 들어가 볼 작정이다.

수려하거나 뛰어나지 않아도 좋아한다는 진심이 있다면 나의 언어는 계속 확장될 것이다.

60억 지구인 중 누구의 마음에라도 커다란 느낌표가 될 수도 있다.

걱정하지 않는다.

앞으로 화성에도 인간이 살 수 있으니.

지구에서 안되면 화성이라도 간다, 나의 언어는 계속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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