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권을 지킨다는 것

미국 영주권? 시민권? 선택의 기로

by 마인풀 라이프

내년이면 미국 영주권 유효기간이 끝난다. 선택의 기로에 섰다.
영주권을 연장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것인가.
시민권을 택한다는 건 곧 한국 국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권 한 권의 무게


나는 문득 생각했다.
한국 여권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공항 심사대에서 여권을 내밀 때, 녹색 표지에 새겨진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내 손끝에서 전해지는 묘한 감각.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자부심과 동시에 살짝의 거리감.

이 작은 책자 한 권에 나의 정체성이 담긴 걸까.


내가 한국인이라고 법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더구나 나는 외국에 있어서 한국에서 투표조차 못한다. 그렇다면 한국 여권을 쥐고 있는 것이 어떤 실질적인 가치를 주는 걸까. 하지만 한편으로, 한국 여권을 내려놓는다는 건 마치 나라를 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부모님과 조상들이 이어온 뿌리를 잘라내는 듯한 불편함이 따라온다.


두 나라 사이에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 얻는 안정감은 분명 크다.
투표권이 생기고, 사회 보장 제도도 확실해진다. 미국에서 장기적으로 살아가려면 시민권자가 되는 게 가장 안전한 길이다.


반대로 한국 여권의 실질적 힘도 있다.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가 많아 여행에 유리하고, 무엇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와의 연결 고리가 된다. 부모님을 만나러 갈 때, 친구들과 다시 어울릴 때, 한국 여권은 나를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이어주는 다리다.


정체성의 혼란


오랜 해외 생활은 정체성의 질문을 더 깊게 만든다.
미국에서는 언제나 나는 “한국 사람”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깨달았다. 여권은 법적 신분일 뿐, 정체성은 그 이상이라는 것을.
내가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어떤 언어로 꿈을 꾸는지, 어떤 역사와 기억을 품고 있는지가 나를 만든다. 여권이 바뀐다고 해서 내 안의 한국까지 지워지지는 않는다.


감정의 무게


그럼에도 갈등은 있었다.
트럼프 집권 이후, 이민자에 대한 시선은 더욱 예민해졌다.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안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혹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언젠가 권리를 잃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럴 때면 “차라리 시민권을 따자. 장기적으로 살려면 그게 낫다”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마음속에서 반박이 올라왔다.


“그래도 나는 한국인인데. 여권까지 바꾸어야 할까?”

한국 국적을 포기한다는 건 도장 하나 찍는 행정 절차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내 뿌리의 한 조각을 잘라내는 일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법적으로 더 이상 한국 시민이 아니라면, 나는 정말로 한국인이라 말할 수 없는 걸까? 나는 여전히 한국어로 생각하고, 김치 냄새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한국의 계절에 맞춰 몸이 반응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미국인이 되는 순간, 내 안의 한국적인 부분이 서서히 지워져버리는 건 아닐까? 마치 오랜 시간이 쌓아 올린 나의 정체성이 서류 한 장 앞에서 흔들리고,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의 정체성이 종이 한 장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건 안다. 국적은 법이 정하지만, 정체성은 삶이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 사이의 간극에서 느껴지는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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