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영희 씨, 모두 다 할 수 없음을 빨리 인정하세요

[스트레스-01] 할 일 많은 김 영희 씨에게

by 영국 엄마달팽이

나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태어날 때 이름은 단 하나, 김 영희로 태어났는데 살면서 지나면서 다른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립니다.

엄마. 김 과장. 며느리. 딸. 여보. 형님. 동서. 학부모. 언니. 동생. 친구. 선배. 후배. 같은 반 아이 친구 엄마...

이름에 따라 해야 할 일도 추가됩니다. 주어진 시간은 24시간, 365일인데 이름이 추가될 때마다 나눠먹는 시간과 체력과 정신력의 파이가 줄어듭니다. 내 이름을 부여하는 관계자들은 더 많은 파이를 나눠달라 보채기도 합니다. 배분과 배율과 순서에 헷갈립니다. 내 이름은 김 영희였습니다. 김 영희의 순서는 언제 돌아오나요? 김 영희는 작은 파이 한 조각받을 수라도 있나요?




삶에서 주어진 모든 영역에서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은 응원받아야 했습니다. 수고를 인정받습니다.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나의 노력이 가치롭게 느껴집니다. 나의 생도 괜찮아 보입니다. 헛된 낭비가 아니었다 다행이다 싶습니다. 이런 기분이 들면 힘들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인정받고 박수받을 수 있다면 이까짓 수고, 좀 더 하면 그만입니다. 까짓 거, 할 수 있습니다.

인정과 감사를 받는 것이 무서운 것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주고 있던 것을 계속 주게 만드네요. 인정과 감사를 받으면, 모자라지 않게 계속 그 기대를 채워주고 싶어집니다. 내가 위치하는 모든 역할이 어제와 같이 흘러가 줘야만 합니다. 한치의 오차 없이 이대로, 이 속도대로, 이 모양대로 가줘야 합니다. 이 스케줄 이대로, 아직은 완벽합니다.




엄마 역할에서 시간을 더 요구합니다. 아이가 아파서 밤새 돌봐줘야 할 것 같습니다. 회사일을 가져와 잠자기 직전, 조금씩 미리 해두면서 가능했던 업무처리 양이었습니다. 그렇게 일 하면서 유지해 온 성과 실적인데, 조금 구멍이 날 것 같습니다. 다른 데서 시간을 끌어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역할을 조금 덜 하고 시간을 만들어내야 할까요?

며느리 역할에서 시간을 더 요구합니다. 아침저녁 문안인사를 주말 하루 방문으로 변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말마다 도서관, 체험관으로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유지한 아이들과의 친밀의 시간, 아이들 교육 활동 관리였는데, 조금 구멍이 날 것 같습니다. 어디서 채워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회사 직원 역할에서 시간을 더 요구합니다. 동료 한 명이 갑자기 그만두어버렸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뽑기까지 그 자리를 대신 채워내야 한답니다. 정시 퇴근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매일 저녁 한 끼는 집밥으로 가족들의 따뜻한 정서를 책임지고 싶었는데. 유일한 남편과의 대화시간에도 조금 구멍이 날 것 같습니다.

서서히 하나씩 작업 과정에 구멍이 납니다. 여기저기 서운함의 잡음이 생깁니다. 맡은 역할들에서도 그다지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돌려막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 정도라도 하니 이 정도 잡음인 거겠지요, 이마저도 안 하면 더 큰 잡음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더 쥐어짜 내 보렵니다. 아, 잠을 줄이면 될 것 같습니다. 먹는 시간도 줄일 수 있습니다. 줄이고 줄여서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해 낼 겁니다. 꼭 다 잘 해낼 겁니다.




반년이 지나고, 나는 쓰러졌습니다. 몸과 마음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천근만근입니다. 처음 보낸 신호는 아니었지 싶습니다. 두통도 있었고, 허리도 아팠고, 소화도 잘 안됐었는데 그게 신호였는지 몰랐습니다. 정신도 신호를 못 받아들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이 다가옵니다.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냅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할 것은 쌓여가는데 아무 계획도 세워지지 않습니다.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생각도 나질 않습니다. 우울합니다. 화가 납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건강을 잃고 나자 알았습니다. 어느 역할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멈춰졌습니다. 한 참을 멈춰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보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조금씩 알아서 돌아가는 겁니다. 모든 역할을 다 하지 않아도 여전히 삶은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두 구석 장난감들 널려있는 거실도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매번 찾아뵙지 못하고 전화만 드려 죄송하단 시댁으로의 전화도 할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 체험관이 아닌 집에서 영화 두 시간을 같이 해도 아이들과 껴안고 볼 비비는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하루 한 끼라도 꼭 손수 만들어 먹이려던 저녁 대신 배달시켜 저녁을 해결하니 남편과의 대화시간이 더 늘어났습니다.




내가 가지려던 그것들, 서로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좋은 미래를 위하여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꼭 그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런 것을 이렇게, 내 건강을 담보로 해야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늘 말해왔으면서 건강이 고꾸라지는 중인지를 눈치챌 여유는 없었습니다. 모든 역할을 다 해내야만 하는 줄 알고 멈춤 없이 달렸습니다. 다행히,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지만 나는 모든 생각을 다시 얻었습니다. 완전히 건강을 잃지 않는 시점에 알아차리게 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멈추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음을 빨리 인정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조금은 덜 망가뜨렸겠지요, 내 건강 말입니다. 그리고 내 삶도 조금은 덜 정신없었겠지요.


<스트레스-02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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